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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Nov 25. 2020

김장하는 날.

-김치가 날 위로할 줄이야.


엄마가 올해도 김장을 하자고 했다.     


평생을 일하는 엄마로 산 우리 엄마는 이상한 고집이 있다. 딴 건 몰라도 김치는 집에서 손수 담근다라는 고집이다.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니신 데다가 올해는 큰 수술까지 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인 것 같아 말려보았다.          


“올해만 사 먹어요.”          


매년 사 먹자는 것도 아니고 올 한 해만 건너뛰어 보자는 거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단호했다.          


“토요일 아침에 일찍 와.”          


음식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음식 솜씨가 좋지도 않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김치는 담가먹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시는 엄마가 때론 이해가 안 된다.     


김장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김장은 하루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저려놓은 배추에 속을 넣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김장을 모르는 사람이다. 김장은 재료 준비부터 시작이다. 우선 배추를 소금물에 절여놓고 기다린다. 배추의 양이 많을 경우 중간중간 배추의 위치를 바꿔가며 소금에 잘 절여지도록 한다. 이것만 꼬박 하루다.

     

남쪽 지방이 고향인 어머니는 젓갈이 많이 들어간 김치를 자신의 시그니처라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그래서 엄마는 김장철이 되면 젓갈을 모으신다. 새우젓 크기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어머니의 김장 철학에 발맞추어 우리 집은 새우젓도 큰 것과 작은 것 두 종류로 사야 한다. 까칠한 딸의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 안 가는 일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김치를 지켜왔다.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액젓과 모양이 누가 먹다 뱉은 것 같은 젓갈 몇 가지를 더 모으면 일주일이 지나간다.     


젓갈 잔치

그렇게 준비가 끝나고 김장하는 날, 적당한 크기로 자른 야채와 젓갈, 고춧가루, 생강, 찹쌀풀 등등의 재료를 넣어 섞으면 내가 넣어야 할 김장 속이 완성된다. 이렇게 김장 속이 준비되면 나는 준비된 김장 속을 배추에 넣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보면 내가 하는 역할은 길고 긴 김장 중 제일 무난한 부분이다. 하지만 올해는 김장이 유독하기 싫었다.      


 연주를 하자고 했다가 말자고 했다가 일주일 사이에도 상황이 계속 바뀐다.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부모는 온라인 수업을 하자고 하고 어떤 다른 부모는 마스크를 쓰고 수업하자고 한다. 그렇게 계속 마스크를 쓰고 레슨을 했더니 1단계 되면 연주를 해주시면서 수업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는 부모도 생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하고 온라인 수업을 하다 학생들과 대면 수업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를 대하는 것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방법도 다르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철학적 질문이 절로 나온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어서  딱히 하소연할 곳 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지쳐있는 이 시기에 김장이라니.     


지칠 대로 지쳐 속으로 욕을 하며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곡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허리야.”     


누가 하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부서질 것 같은 몸으로 도대체 이 짓을 왜 하는 것인가.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사 먹자고 했잖아!!”     


“사 먹는 거랑 집에서 담가 먹는 거랑 같아!!”     


 김장 초반부터 모녀 사이에 고성이 오간다. 생각해보면 작년에도 이랬고 재작년에도 이랬다. 우리 집 김장 날은 언제나 엄마와 내가 짜증이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면 아버지는 눈치를 보고 슬쩍 밖으로 나가고 동생이 말없이 도와주면 그제야 큰소리 없이 끝나는 풍경이었다. 올해도 여전히 나는 짜증이 났고 엄마는 힘들었으며 아버지는 도망가셨고 동생은 말없이 김치통을 날랐다.     


 허리 한 번 못 피고 5시간 동안 배추 속을 넣었다. 다리도 저리고 화도 나 배가 미칠 듯이 고파지는 순간, 뜨끈한 보쌈과 김치가 눈앞에 놓인다. 절인 배추와 새우젓과 배추 속에 무친 달달한 무채 김치. 꿀맛이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욕을 욕을 하면서 20년째 배추 속을 넣고 있는 나도 웃기고 아프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김장은 꼭 해야 한다는 엄마도 웃기고 이 와중에 김장 후 먹는 보쌈이 꿀맛인 게 더더욱 웃기다. 입이 찢어 저라 보쌈을 욱여넣고 먹고 있자니 오래간만에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내년에도 이러고 있겠지..’          


 천지가 개벽해도 엄마는 김장을 한다. 자식들이 끊임없이 투덜거리고 제발 그만하자고 해도 똥고집을 피우시는 엄마의 고집이 이해가 안 가지만, 올해는 이상하게 그 고집에 위로를 받았다. 변하지 않는 것. 내년에도 변하지 않는 풍경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가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에 지친 내게 위로가 됐나 보다.     


“내년에도 김장을 하고 있겠지...” 이 말이 행복이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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