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리뷰.
요즘 김치로 호사를 누린다. 집에 세 가지 맛의 김치가 있기 때문이다. 독거인으로 살다 보니 행여 내가 끼니를 못 챙겨 먹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 두 포기씩 챙겨주시는 건데,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그 누구보다도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나의 밥상에 오르는 김치를 자랑해볼까 한다.
-한 번 빠지면 답이 없습니다.
맛의 극강을 느껴보고 싶다면 경상도 지방의 김치를 먹어보라 권하겠다. 모든 맛이 강하다. 맵고 짜기가 모든 김치 중 최고라고 보면 될 것이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신 부모님 덕으로 내 생의 첫 김치는 경상도식 김치였다. 우리 어머니는 김장김치는 자고로 젓갈을 때려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경상도 김장김치는 방금 담은 것인데도 배추 입 색깔이 노랗다. 젓갈에 찌든 것인지. 다른 지방 김치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느껴진다. 김치가 노랗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김치 맛에 깜짝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도 있고 예의상 한 두 번 더 먹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리 집 김치에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냄새부터가 존재감이 강하다. 김치를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쿰쿰한 냄새가 코를 강타한다. 친구 한 명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걸 어떻게 먹어?”
강한 냄새와 강한 맛은 경상도 지방 김치를 처음 접한 사람이 넘어야 할 첫 도전과제이다. 하지만 이 고비를 잘 넘기면 경상도 김치의 매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강하게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맛이 중독성 있기 때문이다. 워낙 강한 맛이라 딴 반찬이 없어도 충분히 10가지 반찬 역할을 한다. 냄새에 한방 먹고 짠맛에 정신이 확 들다 매워서 얼굴이 빨개지면 밥 한 공기가 금방이다.
경상도 김치의 진짜 매력을 알려면 푹 익혀서 김치찌개를 끓여야 한다. 고기나 참치? 넣을 필요 없다. 멸치 다시물만 넣어 끓여도 고기 넣은 김치찌개 마냥 진하다. 젓갈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강약 조절 잘하고 눈치 잘 보고 분위기를 잘 읽어야 하는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가끔 이렇게 투박하고 직진인 음식이 고플 때가 있다. 경상도 김치가 딱 그렇다. 나는 무조건 강하게 갈 거야. 너는 따라오든지 말든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정말 스웩 넘치는 녀석이다.
-물을 필요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맛있어서 맛있다고 했을 뿐인데 어쩌다 반찬을 주기적으로 얻어먹게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같이 수업하는 선생님이 어느 날, 좀 드셔 보세요 하며 밑반찬을 몇 가지 주셨다. 같은 독거인끼리 동병상련의 마음이었으리라. 진미채, 새우볶음, 피클. 소박하고 정갈한 음식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음식이 특별해지는 순간은 입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맛이나 보자 하고 몇 개 집어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라는 게 이런 맛인가 싶었다.
맛있다는 말을 너무 여러 번 반복했나 보다. 주책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종종 반찬을 보내오시는데 염치도 없이 거절도 안 하고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어떤 맛인지 아니 거절하는 척도 안 하고 냉큼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다.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맛이다. 그리고 올해에는 드디어 김장김치가 왔다.
전라도와 경상도 김치는 비교하기가 딱 좋다. 비슷한 식재료를 쓰면서 맛은 천지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전라도 김치는 얄미울 정도로 강약 조절을 잘한다. 매운가 싶으면 배추의 식감이 나 여기 있소 하고 아삭거리고 짠가 싶으면 속 재료들이 혀에 착 감겨 달게 씹힌다. 경상도 음식이 네가 나를 맞춰라 하는 식이면 전라도 김치는 각종 재주를 부려 사람 혼을 쏙 빼놓는다. 익어봐야 알겠지만 안 봐도 뻔하다 이런 놈은 뭘 해먹도 맛있겠지.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은사님 댁에서 이북 김치를 처음 만났을 때 솔직히 놀랐다. 김장김치라고 하시는데 양념을 넣다가 마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김장김치가 뽀얀 속살을 온전히 내비치고 있는 모습은 생경했다. 모자라는 것보다 넘치는 것이 낫다는 음식 철학을 가지고 계신 분 밑에서 자라다 보니 하얀 김치는 김장김치가 아닌 것 같았다.
이 김치는 맛을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먹으면서도 ‘으잉? 으잉?’ 하기 때문이다. 먹으면 아삭하고 시원한 것이 백김치 같으면서도 맛은 김장김치다. 밥 없이 몇 점을 우걱우걱 씹어 먹어도 부담스럽지가 않다. 재밌는 건 봄 여름 가을 겨울 참 한결같다는 것이다. 김장김치라는 것이 방금 담았을 때와 익혔을 때가 다르고 삭히듯 오래되면 또 맛이 다른데 이북 김치는 그렇지가 않다. 간이 세지 않아서인지 사시사철 시원하고 아삭하고 심심하다.
이 김치는 밥에 먹어도 맛있지만 하얀 소면에 육수 넣고 참기를 두 방울만 넣어 먹으면 정말 끝내준다. 사골을 우려 김치에 넣는다는 것을 듣고는 무릎을 ‘탁’ 쳤다. 역시 음식의 맛은 다 뺀 것 같이 보여도 비장의 무기 하나쯤은 넣어야 완성되는 것이다.
은사님은 이북이 고향이신 어머니가 경기도가 고향인 며느리에게 전수하여 담은 김치라 어머니가 혼자 담으실 때랑 맛이 변한 거 같다고 아쉬워하며 담아주셨지만 내겐 언제나 최고의 이북 김치이다.
세 가지김치를 그릇에 옮겨 놓고 쭉 보고 있자니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 한국인에게 김치가 소울푸드냐고 물어보던 외국인 친구의 질문이 문득 생각나는 밤이다. 여러 사람의 노고와 집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음식이라 그것이 사람에게 전해지면 마음이 따뜻해지니 소울푸드라는 말이 참...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