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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Jun 30. 2020

시인의 에세이는 위험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한 권의 산문집이 모두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힐 수 있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할지 짐작도 어려워 나는 단지 아플 뿐이다. 연인이나 선배 문인을 이야기할 때에도, 홀로 있기 위해 떠났을 때에도, 떠난 곳에서 그곳의 음식을 먹을 때에도 언제나 글을 쓰는 이는 누이를 잃은 시인이라서, 그의 글은 모두 그리움 위에 쓰인 것 같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건 계속 쓰는 일 밖에 없다. 떠난 이가 누리지 못한 것과 그렇지 않아 다행인 것들로 일상을 나누는 까닭에 그가 쓰는 모든 글은 떠난 이를 대신해서 쓰는 일기와 같다. 시인은 한순간으로 평생을 쓸 수 있고, 한 구절로 평생을 살 수 있다.

"에세이는 정말 무서운 장르다. 매력 없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쓴 글보다 매력적인 사람이 대충 쓴 글이 훨씬 재밌다."

최근에 지인이 에세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겠다며 트윗을 보여주었다. 매력이라는 게 도통 무언지 알 수 없어서 정말 정말 무서웠다. 당시 느꼈던 무서움을 두서없이 늘어놓자면, 사실 매력 있는 사람이라 대충 쓰는 건가, 아니 매력 없는 사람은 어떡하라는 거지? 매력 있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쓰면 엄청나게 재밌다는 건가? 하는 잡스러운 고민들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확실한 건 에세이는 정말 무섭고 위험하다는 점이다. 형식적인 제약이 없는 솔직한 글이다 보니 쓰는 사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정신 차려보면 작가와의 안전거리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쓴 사람의 말투가 오디오북처럼 들릴 때가 있고, '참 그 사람답다'라고 종종 생각한다. '참 그 사람답다'라고 느끼는 지점에 따라 웃음이 나기도 하고, 한숨이 나기도 한다. 더욱 위험한 사실은 한 사람의 에세이를 여러 편 읽다 보면 그 사람의 버릇을 알게 되는데, 이쯤 되면 다른 여러 글 사이에 있어도 그 사람의 글을 찾아낼 수 있다. 발소리와 헛기침 소리로 누군가를 맞추고서 화들짝 놀랐을 때처럼, 글 버릇을 알고선 혼자 놀랐던 적이 여럿이다. 

그래서, 시인의 에세이는 유독 위험하다. 시인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한 순간의 감정에 푹 담겨서 겨우 적어낸다. 생각이 많고 내성적인 친구가 머릿속에 온갖 말을 늘어놓았다가 고르고 골라 꺼낸 말처럼, 시어는 수줍기만 하다. 시인을 이해하면 말하지 않은 감정의 흐름을 따라 혼자 짐작하고 함께 아파해야 하는데, 이건 좋다 나쁘다를 떠나 위험하다. 그래서 시 쓰는 사람과는 연애하지 말라고 했나 보다. 같은 지인의 말을 다시 한번 빌리자면, "글 쓰는 사람과 연애하는 건 전부 별로지만, 그중에서도 시를 쓰는 사람은 정말 별로인데, 걔넨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다시 한번 납득하며, 이번엔 무섭다기보단 부끄러웠다. 20대에 한창 시를 썼었는데 그때의 시들을 시라고 하기에 모자라고, 그래서인지 돌아올 수 없는 강에 발조차 담그지 못했던 것 같았다. 다행히도 언젠가부터 시를 쓸래도 쓰이지 않았다.

박준 시인이 적는 감정은 슬픔, 애틋함 같은 것들이다. 그의 글이 우울해서 별로라는 이들이 많아 변호해보자면, 슬픔은 기쁨의 반대가 아니다. '모든 감정의 끝에 이르면 슬픔이 있다'는 은희경 작가님의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슬픔은 불필요한 감정이 아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가 해낸 일들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누구든 사랑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기쁨을 이해하는 것보다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 관계의 영속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는 자주 과거형으로 쓰고, 종종 미래형으로 다짐하고, 좀처럼 현재형으로 단언하지 않는다. 신중한 어투에 걱정과 다짐을 얹어 쓴다. 그의 시집과 산문집을 한 권씩 읽고 나니 조심스러운 어투와 자주 쓰는 어휘가 눈에 익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시인은 외연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마침 나도 그 단어를 좋아한다. '외연'을 생각할 때면, 국경처럼 느껴진다. 사랑의 외연이라고 예를 들어보자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방대한 국가에 여러 모양의 '사랑'이 살고 있는데, 중심에서 한참 벗어나 가까스로 '사랑'안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나 <HER>에서의 사랑이 가장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듯하다. <왕좌의 게임>에서 장벽을 지키는 '나이트 워치'들처럼 주류로부터 버려져 경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외연'에 있다. 외연은 넓힌다는 서술어와 자주 조합되는데, 외연을 넓히는 건 포용이며 내 삶의 지향점이다. 나는 편협함을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처럼 항상 경계할 것이다. 

나는 시에게 부끄럽고, 에세이가 무섭다. 등단한 시인들의 무거운 삶과 문장을 볼 때에도, 칠곡 할머니들이 갓 배운 한글로 쓴 시를 볼 때에도 자주 부끄럽다. 그런 시를 업으로 쓰는 사람의 에세이를 보는 기분은 부끄럽고 무섭고 또 슬프고 해서 무엇이라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쓰고 나니 또 하나의 긴 변명이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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