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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Nov 11. 2019

정시에 퇴근하려면: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자

9급은 정말 여섯 시에 퇴근하는가

민감한 사안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계획서와 보고서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했다. 그만큼 문서를 작성하는 일과 상사에게 보고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에 대해 추가적으로 두 가지를 권하고 싶다.


첫 번째, 보고를 받는 상사를 심리적으로 안심시켜 줄 것을 권한다. 무겁고 복잡한 사안을 보고받을 때 희열을 느끼는 상사는 많지 않다. 9급 공채생이 무겁고 복잡한 사안을 보고할 일 역시 그리 많지 않다. 나의 경우는 대부분 “특별한 사안은 아닙니다.”라는 말로 보고를 시작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상사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누그러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그럴 일이 많지는 않겠지만, 무겁고 복잡하고 민감한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여러분이 충분히 고민을 많이 한 뒤에,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명확하게 중심을 잡아서,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할 것을 권한다. 이때는 다이어그램을 그리거나 표를 작성해서 체계적으로, 구조적으로 사안을 분석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A라는 조치를 취할 때 발생하게 되는 기대 효과와 부작용, 장점과 단점이 그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그 이후, 필요에 따라 직속 상관과 상의하거나 고참들의 경험과 지혜를 참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따금 해당 사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쉽게 하는 고참이 있는데, 이런 고참 말은 듣지 않는 게 좋다.



상사도 고참도 여러분의 공식적 책임을 나눠 갖지 않는다. 내가 발의하고 내가 기안해서 내 이름이 기재된 공식 문서로 인해 훗날 문제가 발생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품의제도에 따라 계선을 거쳐 관리자들이 함께 결재한 문서라 해도 관리자는 관리자로서 책임을 지고, 담당자는 담당자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충분히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면 그 생각의 결과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하고 상관에게 보고하면 된다. 만약 여러분의 소신이 옳다는 확신이 있다면, 상관과 견해가 다르다고 해도 그 소신을 밀고 나갈 것을 권한다. 대부분의 경우, 무겁고 복잡한 사안에 대해 담당자보다 더 많이, 더 깊이 생각해 본 관리자는 많지 않다. 따라서 담당자가 배에 힘주고 소신을 밝히면 상관이라고 해도 담당자 의견을 꺾기가 부담스러워진다. 무겁고 복잡한 사안에서 담당자가 확신과 소신을 갖지 못하면 상사와 주변 환경에 휘둘리게 된다.


9급 공채생이 내려야 할 무게 있는 판단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사실 특별한 일이 많지는 않다.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앞으로 이 직업을 갖고 일하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이다.


내가 겪었던 사례를 하나 소개하도록 하겠다. 기획예산과에서 도시관리공단*1 관련 업무를 맡고 있을 때였다. 도시관리공단은 지방정부가 출연(出捐)한(쉽게 말하자면 자본금을 준) 지방정부의 산하기관(傘下機關)이다. 문화재단과 복지재단도 마찬가지로 지방정부가 자본금을 출연해서 설립한 지방정부의 산하기관이다.


지방정부 산하기관이라 해도 도시관리공단은 기획예산과에서 ‘지방공기업법’에 따라 관리하고 있었고, 문화재단과 복지재단은 각각 문화체육과와 복지정책과에서 ‘지방자치단체 출자․출연 기관*2의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지방출자출연법)’에 따라 관리하고 있었다.


지방출자출연법은 2014년에 제정되었다. 법률 조문 중에, 출자․출연 기관의 설립 목적, 주요 업무, 비용 부담, 경영 실적 평가, 경영 진단 등 구체적인 사항은 지방정부의 조례(條例)*3로 정한다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지방출자출연법 제4조, 제21조, 31조 등). 이러한 규정을 흔히 ‘조례 위임 규정’이라고 한다. 2015년 가을에 기획예산과에 와서 도시관리공단 업무를 맡게 되었던 나는 전임자로부터 지방출자출연법의 조례 위임 규정에 따라 ‘**구 출자․출연 기관의 운영에 관한 조례’를 입안해야 한다는 업무 인계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지방공기업(도시관리공단)과 출자․출연 기관(문화재단, 복지재단)에 대한 개념과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업무 인계를 받았기에 그해 안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관련 법률을 자세하게 읽고 현실을 돌아보니, 이 조례가 불필요한 조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방공기업과 출자․출연 기관은 근거 법률도 다르고, 관할 부서도 다르다. 게다가 문화재단과 복지재단에 관한 조례(개별 조례)는 이미 제정되어 있었다. 문화재단과 복지재단에 관한 규정을 ‘출자․출연 기관의 운영에 관한 조례(총괄 조례)’에 규정해 두면 기획예산과에서 이들 재단 업무의 일부, 특히 ‘출자․출연 기관 운영심의회’에 관한 일을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운영심의회가 개최될 때 문화재단과 복지재단의 업무를 잘 모르는 기획예산과 도시관리공단 담당이 회의를 주관한다고 생각해 보자. 공단 담당은 재단 담당자와 심의위원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서 원활하게 회의를 주재하지 못할 수 있다. 누구도 만족하지 못할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예상되는 최악의 경우로는, 총괄 조례에 의해 구성된 심의위원회와 개별 조례에 의해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의사결정이 충돌할 경우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마침내 나는 이 조례가 ‘불필요한 옥상옥(屋上屋)*4’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제정되어 있는 각 재단의 개별 조례에 필요한 내용을 수록해서 개정하는 것만으로도 법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제처 간부가 지방정부를 찾아와 실시한 교육과 자문 결과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문서를 작성해서 팀장과 과장에게 보고하고, 공감을 얻었다. 이 의사결정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문제는, 그동안 다른 일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이 일을 1년 동안 미뤄 왔다는 점이었다. 의사결정 번복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많이 경과한 것에 대해 사과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1년 전에는 ‘곧 조례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말해 놓고, 1년이 지나서는 “기획예산과에서는 이 조례를 안 만들겠습니다.”라고 선언하니, 문화체육과의 문화재단 담당과 복지정책과의 복지재단 담당이 나를 곱게 봐 주실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분들은 나보다 공직 경력이 한참 높으신 고참들이셨다. 이제 욕 먹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기획예산과 사무실에서 나, 나의 팀장, 문화재단 담당자, 복지재단 담당자 등 4명이 모였다. 1년 전의 계획을 스스로 번복한 후배의 결정을 얼마든지 강하게 비판할 수 있었을 텐데, 다행히 선배들은 이 사안을, 그리고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성적으로 대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선배들의 인격에 감사할 일이다. 선배들은 ‘**구 출자․출연 기관의 운영에 관한 조례’가 훗날 번거로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각 재단의 개별 조례를 개정해서 위임 규정을 수록하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나의 주장에 적극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결국 조례는 입안되지 않았고, 따라서 제정되지 않았다.


‘일 안 하려고 무진장 애쓰네.’ 비판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의사결정 번복에 이르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경과한 것은 내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나는 불필요한 조례를 새롭게 만들지 않음으로써 기획예산과는 물론 구청 전체의 업무 효율성을 보이지 않게 향상시켰다고 판단한다. 뭔가 그럴싸한 사례를 제시하지 못하고, 일 안 하는 방향으로 심지를 굳게 정한 사례를 소개해서 미안하다. 이때 작성한 문서도 이 책의 끝에 부록으로 수록해 두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만 해 두기 바란다.


손이 빨라야 일찍 퇴근할 수 있다

문서에 내용을 수록하는 일 못지않게 문서를 편집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손이 빨라야 일을 빨리 끝낼 수 있다. 일찍 퇴근하기 위해서는 한글 워드 프로그램, 엑셀, 파워포인트와 같이 사무 소프트웨어를 능숙하게 쓸 줄 아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특히 한글 워드 프로그램은 사무직이라면 평생 써야 하는 소프트웨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활용한다. 가급적이면 마우스 클릭 안 하고, 키보드 위에서만 손을 놀릴 수 있도록 웬만한 단축 키는 다 외워서 쓰고, 중요한 기능은 다 쓸 줄 아는 게 좋고, 스타일이나 매크로 같은 고급 기술까지 익혀 둘 것을 권한다.


문서 편집 중 한 개의 작업을 할 때 단축 키를 써서 작업을 완료한 시간과 마우스 클릭해서 작업을 완료한 시간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는 않을 수 있다. 즉, 한 페이지를 통째로 삭제하는 작업에 있어, F3, 마우스로 한 페이지 전체 드래그, Delete 버튼을 눌러 삭제하는 시간과, F3, Alt+Page Down, Delete 버튼을 눌러 삭제하는 시간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단축 키를 써서 줄인 시간이 모이면 무시할 수 없는 시간 격차가 벌어진다. 단축 키를 써서 문서 작업을 완료한 전체 시간과 마우스 클릭해서 문서 작업을 완료한 전체 시간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문서 페이지가 많으면 더더욱 그러하다.


군 복무 기간 동안 행정병으로 일했는데, 군대 선임은 문서 작업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 단축 키를 외워 쓰도록 강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6개월의 군 복무 기간 동안 한글 워드 프로그램을 익히게 된 일이 정시 퇴근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들 법도 하다. ‘아니, 제때 퇴근하려면 업무에 있어 거의 프로페셔널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잖아! 장난해?’ 만약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내용을 잘 파악한 것이다. 앞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9급 공채생이 하는 일은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 절대 아니라고. 업무에 정통하는 것이 빨리 퇴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돌아가는 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공시생이 단기간에 빠르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수험 교재(기본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강의를 여러 번 반복해서 수강하고, 강의 수강 외에 혼자서 공부하는 시간을 매일 8시간 이상 확보해서 집중력 있게 공부하고, 교재에 수록된 기출문제는 남김없이 다 풀고, 시험일이 다가올 즈음에는 실제 시험과 동일한 환경이 주어지는 모의고사에 응시함으로써 실전 감각을 키우고, 시험 당일에는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서 시험에 임하는 것 아닌가? 돌아가는 길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업무도 이와 같다.




*1 도시관리공단은 지방정부가 출연(出捐)한 지방공기업이다. 주민 복리 증진, 지역경제 활성화, 지역 개발 촉진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업 중에서 민간의 경영 참여가 어려운 분야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지방정부가 설립하는 기관이다(지방공기업법 제2조, 제76조).

*2 지방자치단체 출자․출연 기관은 도시관리공단과 마찬가지로 지방정부가 자본금을 출연하여 설립한 기관을 말한다. 문화, 예술, 장학 등의 분야에서 주민의 복리 증진, 주민 소득 증대,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을 그 대상으로 한다(지방출자출연법 제2조, 제4조). 대표적으로 문화재단과 복지재단이 있다.

*3 지방정부가 법령의 범위 안에서 그 지방의 사무에 관해 제정하는 규정으로서 지방의회의 의결에 의해 제정된다(지방자치법 제22조).

*4 지붕 위의 지붕이라는 뜻으로 불필요한 구조를 비유적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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