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가는 중입니다

새로운 꿈

by 무쌍

이삿짐을 정리하다 문득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손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가고 싶어 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가사 크리스티의 잠자는 살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여자를 마중 나온 남자는 차 안이 넘치게 짐을 싣고 가면서 묻는다.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요?" 여자는 시 큰 등 하게 "인생을 다 옮겨왔거든요."라고 대답한다.

다시 집안의 물건들을 둘러봤다. 이곳에 내 인생이 있을까?

책장엔 읽어온 책과 아이들에게 골라준 책이 꽂혀있다. 아이들의 장난감은 남편과 내가 골랐거나, 아이들과 산 것들이다. 부엌살림은 모두 내 것이다. 내가 깨뜨려서 짝이 안 맞는 그릇들은 만들었고, 냉장고 속 식재료들도 내가 사들고 왔다. 이불은 대부분 내가 골랐고, 신혼살림에 마련한 것들이다. 베란다엔 화분들이 많다. 식물을 좋아하는 내가 빈 화분마다 나무를 심었고, 작은 텃밭상자는 남편을 설득해서 샀다. 신발과 옷들도 내가 고르거나 내가 사 온 것들이다. 가족들의 물건들은 모두 내가 집으로 오라고 허락한 것이었다. 그랬구나! 내 짐이 아닌 것이 없으니 몸이 고단하고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정리하면서 물건은 쓰는 가족에게 의견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일 이사를 가야 하는데 오늘 아침 거실은 여전히 어수선하다. 십 년 동안 가만히 있던 물건들을 이사 가려고 다 깨웠다. 생각나지 않았던 과거들이 발견되었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물건들도 나왔다. 미래에 쓸 것들은 대부분 재활용 쓰레기로 처리되었다. 빛바랜 과거도 20년쯤은 쓰레기봉투로 들어갔다. 결국 남은 건 '지금' 뿐이었다. 금 인생을 좀 바꾸고 싶다.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간을 바꾸는 것을 선택했다.

김정운 교수가 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책엔 "슈필 라움: Spielraum" 이란 단어가 나온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여유공간이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정확하게 우리말로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없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이란 뜻이다. 어떤 공간에서는 심리적인 여유까지 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편이 늘 바라는 지하 벙커가 슈필라움이라고 생각하니 금방 이해가 되었다.


새로 이사 가는 곳은 나무가 많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라서 조경이 더 매력적이다. 나무들이 많고, 긴 의자가 놓인 휴식 공간에 등나무가 길게 뻗어있다. 단지 사이 거리가 멀어서 집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탁 트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일가친척이 없는 공간을 찾아서 고향을 떠나왔다.(물론 결혼은 통해서 시댁 식구가 추가로 생기긴 했지만 ^^;) 타인은 내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타인을 의식한다는 것은 타인의 반응을 통해서 내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고민하는 아이처럼 계속 살고 싶지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처럼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런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공간을 바꾸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주변 환경이 취향과 활동, 관심이 반영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두 아이가 다닐 학교는 걸어가는 동안 짧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다. 마트는 학교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아이들 학교 옆에 담장을 따라 걸어가면 작은 도서관이 있다. 집 현관문을 열면 수많은 나무가 마주 보고 있다. 덤으로 얻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엄마 역할을 위한 시간 여유가 생긴다. 그럼 원하는 '고독의 시간'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하루 종일 혼자 지치지 않고 즐겁게 공간을 누비고 다닐 수 있기를 바란다. 새로움을 앞두니 삶의 가능성도 함께 꿈꾸게 되는 듯하다. 가족들이 원하는 마당 있는 단독주택은 아니지만 새로운 공간으로 간다. 지금 삶을 옮겨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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