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어두운 땅속에서 준비를 마치고

중랑천 제비꽃에게

by 무쌍

야생화와 나무를 찾아 산책하며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사진을 찍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 겨울을 견디며 에세이를 씁니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 기록들입니다.





중랑천 제비꽃에게



꽤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단다. 중랑천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두 계절을 보내버렸구나. 올봄 중랑천에 너희들이 만개했을 텐데 찾아 가보지 못할 것 같아. 중랑천에는 너희들이 얼마나 피었을까?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 폴더를 열었더니 생생하게도 그날이 떠오르는구나.

아이들이 크면 나도 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일상에서 해내야 하는 일들은 줄어들지가 않아. 여전히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글을 쓰는 일을 하려면 글쓰기를 가장 우선으로 두어야 하겠지만 늘 핑계가 많구나.




그래도 집안일이 버겁고 짜증이 솟구칠 때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집 밖으로 나간단다. 음식물 쓰레기라도 들고 일단 밖으로 나오면 가슴이 트이거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옆 동에 있는 쓰레기함까지 걸어가는 길에서도 중랑천을 산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단다. 아파트 현관에서부터 철쭉이 활짝 피었고, 화단 사이에 작은 제비꽃들이 줄지어 피었단다. 모과나무도 분홍색 꽃이 피었고, 아직 남은 라일락 꽃송이가 향기로운 바람을 느끼게 해주고 있단다. 이렇게 화단의 나무들을 보며 바람을 쐬는 것 만으로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어.

멀리 나가지 않아도 화단엔 너를 닮은 보랏빛 제비꽃들도 있고, 미국 제비꽃이라고 부르는 종지나물들도 피어있단다. 봄마다 같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너와 같은 야생화들은 대단한 것 같아. 약속을 지키며 핀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거든.

난 가까운 사람들과 작은 약속 하나 지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란다. 매일 오가는 길목에서 너와 같은 야생화를 보고 인사를 건네는 것이 작지만 근사한 즐거움이란다. 꽃이 다 피고 나면 잎은 더 무성해지고 다음 꽃을 피울 준비를 하겠지.


화단에 핀 종지나물(미국 제비꽃)




중랑천 산책로에 핀 제비꽃 너를 발견하고 놀란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핀 자리였어. 야생화들이 무성하고 나무들이 있는 평지가 아니라 시멘트 발린 구석 작은 틈새였거든.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둑에 층층이 쌓아 올린 벽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피어있는 너를 찾았단다.


중랑천 둑에 핀 제비꽃

낭떠러지 절벽에서 기적을 만난 것이 아닐까 싶었어. 첫눈에는 작은 꽃송이만 보였지만, 가만히 보니 수백 송이로 피어나 있었어. 너는 어떻게 그 틈에 자리를 잡고 피어난 것일까? 사실 도시에 사는 야생초들은 봄이면 콘크리트 틈 사이나 보도블록 사이로 솟아오르듯이 피어나는 걸 볼 수 있거든. 그래서 그 생명력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야생초 중에 유독 너는 나를 반하게 해, 몸을 작게 엎드려 사진을 찍게 하지. 꽃이 지면 작은 씨앗을 만들어 날려 보내지만, 개미들이 제비꽃 씨앗에 달린 하얀 뭉치를 좋아한다지? 개미들이 물어다 먹고는 씨는 그냥 버려진다고 하던데. 어쩌면 작은 씨앗들이 데굴데굴 굴러가 숨을 곳은 작은 틈이나 벽처럼 막힌 구석진 곳이었을까? 그렇게 잘 숨었다가 제비가 오는 봄이 되면 피어나 보게 되는구나.





요즘 나는 봄이 오긴 했는데 겨울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던 것 같아. 깊고 어두운 땅속에서 모든 준비를 마쳤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래야 뜨거운 여름 태양과 비바람을 받아들이고 에너지를 채워 열매를 맺을 텐데. 자연의 초록 생물들은 여름을 보내고 나면, 양분을 모두 다 모아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 그런데 나는 자꾸만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망설이고 있는지 모르겠단다. 이렇게 바쁜 일상을 탓하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열매를 맺기만 바라면 안 되겠지.

차근차근 작은 이야기들을 모았어. 어느덧 메모가 채워진 노트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꽃 사진은 계절마다 추억을 저장했단다.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듯 하지만, 때때로 상상 못 한 일에 이끌려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을 맞이 하기도 해. 그래도 나만의 속도로 갈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믿고 있단다. 나의 사연들도 오래도록 묵혀놨으니 이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겠구나. 네가 땅을 뚫고 나간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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