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피면 그녀가 생각난다

원이엄마편지

by 무쌍
"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능소화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
- 조두진 < 능소화> 400년 전에 부친 편지 중에서


장마가 시작되었나 보다. 능소화가 만개한 담장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곧 송이채 떨어질 능소화가 한꺼번에 핀 듯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능소화가 가득 핀 아치가 눈에 띄었다. 그 앞에서 꽃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딴생각을 하느라 그만 지나쳐 버렸다. 능소화를 보면 떠오르는 한 여인이 있다. 여인이라고만 하는 건 그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420년 전 살던 그녀에 대한 기록은 그녀가 쓴 편지 한 장뿐이다.


1998년 안동에서 택지를 개발하며 미라 상태로 여러 유물들이 함께 묻혀 있던 이응태라는 이 씨 집안의 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원본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부인이었던 그녀의 손편지가 발견되었다.

무덤에서 발견된 편지 원본

종이 한 장을 채우고도 모서리 빈 여백에 써 내려간 편지는 쓰인 글만큼이나 슬프다. 종이가 한 장밖에 없던 것일까? 무덤 안에 그녀의 편지 외에도 가족들이 쓴 편지를 포함 종이 다발이 있었다고 하니 서른한 살 남자의 죽음은 사연이 많은 듯싶다.

편지와 함께 짚신 한 켤레가 발견되었다는데, 아픈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머리카락을 섞어 만든 '미투리'라는 짚신었다. 원이 아빠에게 라며 시작하는 편지글은 뱃속에 아이를 가진 여자가 남편을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편지였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편지와 신발 한 켤레는 슬픈 부부의 이별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편지를 모티브로 <능소화> 소설책이 나왔고, 능소화 속 전설 같은 이야기는 소설이 아닌 듯 진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름 모를 그녀의 편지는 시간이 흘러 나에게로 왔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그녀를 잠시 그려봤다. 편지 속 손 글씨는 그녀의 얼굴이었고, 편지 속 글은 그녀의 인생을 담고 있는 듯했다. 쓰인 글이 갖고 있는 알 수 없는 마법은 편지 한 장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방금 전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 보려고 작년에 찍은 사진을 꺼냈다. 그런데 사진 속 바닥을 향해 늘어진 꽃이 그녀가 써 내려간 한 줄 한 줄 편지글처럼 보였다.

마지막 능소화 꽃이 떨어질 때까지 그녀를 보러 가듯 찾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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