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에 도착해 제주에서 수화물로 맡긴 여행가방을 찾아야 했다. 우르르 몰려나온 승객들을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었다. 모두 짐이 내려올 통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화물 찾으면금방 달리기 시합을 할 듯 초초한 사람들같았다.
자신의 인생에 들어오지 말라는 듯 누구도 틈을 내주지 않았다. 한 바퀴를 빙 돌고 겨우 빈 곳을 찾는데 수화물이 처음 내려오는 통로 앞이었다. 겨우 손을 뻗어 가방을 잡을 만큼 자리를 차지했다.
"수화물 중에 비슷한 가방이 많으니 티켓의 수화물 번호를 확인 바랍니다." 직원이 수화물 벨트 위로 왔다 갔다 하며 반복해서 말을 했다. 그리고 벨트 위에 수화물 샘플 가방이 있었는데 내 가방과 똑같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내 가방은 누구든 들고 갈 수 있을 듯했다. 가방은 벨트 위로 금방 내려오지 않았다.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짐을 찾은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니, 내 주변에 많았던 사람들이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때였다. 탈탈탈수화물 벨트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데 순식간에 내 가방이 지나갔다. 손잡이를 잡고 들어야 하는데 놓쳐버렸다. 따라가려는데 사람들이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시한 바퀴를 돌아 내 앞으로 오길 기다려야 했다. 가방이 다시 내 앞으로 왔을 땐 나만 그곳에 남아 있었다.
대합실을 나왔지만 나를 마중 나올 사람이 없었다. 일단 서울 시내로 들어갈 지하철을 타야 했다. 그제야 집을 탈출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따라올 사람도 마중 나온 사람도 없이 나만 거기에 있었다. 방금 전 마지막까지 빙글빙글 돌고 있던 여행가방처럼 나도 덩그러니 남겨졌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 공항에서 맡았던 공기는 낯설고 알 수 없었다. 분명 담배냄새, 자동차 매연이 적당히 섞인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공기였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풍기는 화장품 향기,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소음은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눈이 바쁜데도 모두 느껴졌다. 잠시 어지럼증이 났고, 커피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다.
자판기에서 뽑은 작은 종이컵 커피를 아주 느리게 마셨다.9월 1일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보라색 맥문동꽃이 만발해졌다 2021.09.01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용돈 지갑을 들고 문구점으로 쇼핑을 가겠다고 했다. 즐거운 쇼핑을 할 마음에 신이 난 큰 아이가 용돈으로 카푸치노 한잔을 선물해줬다. 그리고 엄마를 남겨두고 아이들은 쇼핑하러 갔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카푸치노 한잔과 난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이들이 준 자유를 만끽해야 했다. 커피를 마시려고 앉은자리엔 보라색 긴 꽃을 피운 맥문동이 끝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바람은 모든 걸 깨끗하게 청소한 듯, 주변이 모두 선명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이십 년도 넘은 김포공항의 커피맛이 떠올랐다. 바로 자유의 맛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눈앞에 맥문동 꽃이 흐릿하게 보일 때가 되어서야, 야단법석 소리를 내며 아이들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