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첫눈이 내렸다

설악초

by 무쌍

눈처럼 하얀 꽃이 피고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내린 눈을 본 듯 초겨울을 떠올렸다. 설악초는 모양새만큼이나 름이 어울리는 꽃이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설악초는 마치 산에 눈이 쌓인 듯 설경을 떠올리게 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봄엔 그저 초록잎이 달린 외줄기가 자라는데 여름 무렵 줄기 끝에 하얀 꽃 핀다. 잎 사이에 조그마한 꽃이 계속 피는데, 신기하게도 잎도 분을 바른 듯 테두리가 하얗게 변간다. 마치 잎이나 꽃이나 한 몸처럼 있는 그대로가 흰 꽃이 되어 갔다. 바깥에서부터 하얗게 변한 잎은 중심부에 늘게 록 흔적만 남는다.

록잎이 하얗게 변하는 건 꽃을 피우며 마그네슘 성분이 빠지는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차츰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는 내 모습도 저리 곱게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 설악초는 오래 피어 있는데 한여름에 기 시작한 꽃이 눈이 내릴 때까지 끄떡없이 남아 있었다. 설악초의 런 모습을 닮고 싶은 듯, 나도 아이들에게 인내심을 키우려고 노력 중이다.


까슬거리지 않고 매끄러운 잎을 쉽게 넘보지 못해서 일까? 병충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꽃을 좋아하는 분들 사이에선 사랑을 많이 받은 꽃이기도 했다. 한해만 자라는 일 년생이지만 정원사가 든든하게 의지 할만한 고마운 화초가 아닐 수 없다.


10월 하순의 설악초와 11월 하순 설악초

여름 방학에 지친 나는 새벽이면 가족들이 자는 틈에 동네 산책을 갔다. 집 바로 뒤엔 산이 있었는데 산 아래엔 작고 오래된 주택들이 많았다. 주택들 마다 꽃을 키우는 취향이 달랐는데 유독 맨드라미와 분꽃을 좋아하시는 할머니가 어느 해부터 설악초를 더 많이 심으셨다.

여름이 시들해지는 틈에 설악초가 새하얀 눈처럼 화단을 뒤덮었다. 광경 앞에선 첫눈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골목은 설악초가 한꺼번에 피어났다. 이유는 모르지만 화단을 가꾸는 분들의 씨앗 나누기를 하지 않았을까? 나도 그 골목에 살게 되면 씨앗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었다.

그 골목에 설악초는 겨울 방학이 다가올 때까지도 여름에 핀 모습 그대로 박제한 듯 살아 있었다. 서늘해진 공기에 가을꽃들과 나란히 피었지만 지난여름에 피었다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꽃을 피우느라 잎가장자리가 하얗게 변해간다.

그 골목길 화분에 있던 설악초가 또 나타났다. 매리골드와 설악초가 정성스러운 아저씨 손에 싱싱한 잎을 뽐내고 있었다.

봉선화, 백일홍과 루드베키아가 주인공이었던 화단은 이제 설악초에게 자리를 내어준 듯했다. 화단 중앙에서 가지가 나무처럼 늘어지고 화단을 덮으며 가장 싱그러웠.

아직 꽃이 덜 핀 매리골드는 설악초의 기운 때문인지 청량한 공기 먹은 듯 신선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전히 덥지만 절기상 입추 날이었다. 서서히 설악초 잎이 하얗게 변하듯 공기는 서늘한 가을이 가까워진 듯했다.

한여름에 첫눈 내린 설악초를 만나니 눈 쌓인 겨울이 금방 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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