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걸

by 무쌍




큰 아이는 어느새 학교에 입학을 했다. 아직은 혼자 등교시키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모차에 둘째를 태우고 집을 나섰다. 매일 같이 오가는 모퉁이에 안보이던 보랏빛 야생화가 피어있었다. 가는 길을 재촉하는 아이들을 붙들고 제비꽃 사진을 찍었다.


잃어버렸던 지갑을 찾은 기분처럼 철렁하더니 가슴 어딘가가 뭉클해졌다. 산후우울증인지 아니면, 갑상선이 문제인지 그 무렵 자주 울컥해지던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낡고 허물어져가는 도로에서 작은 제비꽃이 야무지게 콘크리트 틈에서 피어났다. 이 사진을 SNS 올리며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걸..."이라고 짧은 글을 남겼다. 아이들 소식을 가끔씩 올리는 공간이었지만 뭔가를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이 사진을 보면서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쏟아졌다.


2016.4.25



나도 이제 서서히 뭔가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는지도 모른다. 제비꽃을 만나서 나의 운이 좋은 방향으로 바뀐 날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작은 야생화가 일러준 대로 살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신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해 봄에 본 꽃들은 틈이 나는 대로 찍었고, 차근차근 SNS 사진을 올리며 야생화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야생화 관련 사진집과 책은 모조리 봤다. 꽃 이름을 기억하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영어 단어 외우듯 공부가 필요했고, 동네 산책하며 찍은 꽃들의 이름 정도는 알게 되었다.

덩달아 몸도 가벼워졌다. 매일 빠뜨리지 않고 먹어야 할 갑상선 기능 저하증 호르몬 약을 줄이기 시작했다. 두 알이었던 약은 한알 그리고 반알로 줄여도 몸은 이상이 없게 되었다. 5년 넘게 무기력했던 갑상선이 나를 지배했다면 야생화를 찍고 배우면서 스스로 힘을 내기 시작했다.


어느 봄에 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유모차에 탄 아이는 금방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새로 이사 온 동네가 궁금하기도 하고 몸이 제법 가볍게 느껴져서 걸으면서 좀 둘러보고 싶었다.

주변엔 아파트 단지가 거의 없고 대부분 주택이 있는 오래된 동네였다. 담이 낮게 쌓인 어느 집은 마당이 온통 텃밭이었다. 또 한집은 2층까지 뻗어 올라간 관리가 잘된 감나무가 있고 장미덩굴이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담벼락 아래로 새하얀 라일락 꽃이 보였다.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도 이런 라일락 나무가 있었는데, 너무나 반가워 잠시 향기를 맡았다. 그 뒤로 장을 보러 가는 길엔 일부러 그 집을 지나쳐 갔다.


라일락 꽃이 지기 전에 그 집은 철거되었다. 그리고 텃밭이 있던 집도 사라졌다. 꽃과 나무가 있던 주택들이 하나둘 사라져 동네 풍경이 바뀌었다. 꽃이 피고 나면 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다시 필 것이란 기약도 사라져 버렸다.


중랑천 수레국화 꽃밭 2017


버지니아 울프는 나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나는 집을 벗어나 잠시 쉴 수 있는 은신처를 갖고 싶었다. 내 몸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다. 집안엔 항상 해야 될 일이 줄지어 있는데, 내 방을 하나 갖는다고 해도 모른척할 수가 없다.

가족들이 없는 시간에는 산책하며 꽃을 찾는 약간의 집착이 생겼다.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에너지를 꽃을 찍으며 채워갔다.

야생화 한송이가 핀 곳은 나만의 은신처가 되었고, 동네에서 찾은 야생화를 보고 느낀 감정들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수레국화 꽃밭을 보고 쓴 글로 공모전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아무런 기대도 없던 나에게 글 쓸 힘을 주었다. 이제는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다.

수레국화 꽃밭 2017.6.6

나는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엄마다. 하지만 꽃밭을 찾아 꽃 사진을 찍는 일은 잊지 않고 있다. 일은 글을 쓰기 위한 시작이다. 야생화들은 어디서든 필 준비를 하고 있으니, 나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한송이가 피어있던, 꽃밭이 되어 있던, 나에겐 정원이다. 그 정원은 내 은신처가 되었고, 두 손은 사진을 찍으며 머릿속 빈 노트에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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