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둘째가 잠이 들자 혼자 도서관으로 가방을 들고 나섰단다. 모처럼 봉화산 둘레길로 도서관을 가려고 하니 가을 단풍 물든 너희들이 무척 궁금해지는구나. 10월도 얼마 남지 않은 가을날이란다. 어제 가을비가 종일 내려서, 바람 속 공기가 사납게 외투를 파고드는 것 같아. 오후 4시 하늘은 짙은 색으로 벌써 기울어진다. 등산로 입구에 연두 빛 모과가 노랗게 익어가는데 새찬 바람에도 단단히 달려있구나. 모과나무 아래를 지날 때 툭 떨어지면 손으로 받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머리 위로 붉게 물든 담쟁이 잎들만 쏟아지는구나.
산책로를 걸어 올라가는데 팥배나무 잎과 붉은 열매가 계단에 잔뜩 깔렸단다. 팥배나무 뒤로는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줄지어 빽빽하게 산을 채우고 있구나. 아직 나무들은 울창하게 잎사귀를 물고 있어, 바람에 나무들이 더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것 같아.
팥배나무 붉은 열매
나무들이 내는 소리가 좋아질 때 산아래로 이어지는 작은 공원이 나온단다. 공원에 핀 꽃을 보고 계단이 없는 편안한 산책로로 바로 가려면 공원을 가로질러 산을 내려가야 하거든. 꽃만 쫓아다니다, 봉화산에 오르니 반짝이며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이 가을이 왔다고 알려주는구나.
언덕에서 본 하늘
신갈나무 숲을 지나 언덕 아래를 내려가는 순간을 무척 좋아한단다. 잠깐 동안이지만 하늘이 보이고 아무도 없는 고요함을 느끼며 바람이 나무들과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언덕에 보랏빛 꽃을 피운 싸리나무가 찰랑거리고 서양등골나물이 하얀 꽃을 피우면 가을꽃 사진 찍기도 시작된단다.
가을에 피는 꽃향기는 봄꽃과는 다르게 그윽하고 잔 향기가 오래도록 남아 기분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 하얀 꽃을 피우면서 갓털을 만드는 서양등골나물들이 보이면 곧, 첫눈이 내린단다. 그리고 작고 동그란 갓털은 꽃이 없는 겨울 산에 유일한 꽃이 된단다.
봉화산의 청설모(청서)
어디선가 귀여운 꼬리를 한 청설모가 나타났어. 요란하게 도토리 껍질을 돌려가며 벗겨내고 알맹이를 요리조리 갉아먹는 청설모를 만났단다. 청설모와 나는 나무 몇 그루를 사이에 두고 마주 하고 있었어. 내가 가만히 서있자 안심했는지 도토리를 베어 문 볼은 볼록거리고 하얀 이빨을 보이며 잘도 먹더구나. 나무를 타는 청설모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지켜봤단다. 지난번 만난 청설모는 부지런히 산을 돌아다니며 너희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싶구나.
정자와 테이블 사이로 가을꽃 구절초가 피어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구나.
지난여름 등산로 공사가 있었어. 구절초 군락지에 포클레인이 몇 대가 오가더니 모조리 거친 바퀴에 뭉개져 버렸단다. 한들 거리며 핀 구절초는 이미 수명을 다해버렸나 보구나. 사람들은 자연이 어렵게 만들어 놓은 걸 순간에 밟아 버리는구나.
황량한 늦가을에 붉은색으로 갈아입은 수크령은 이제 절정이다. 마치, 화단을 책임지는 것 같다. 수크령 아래로 노란 산국화가 만발해 향기가 향긋하구나. 산 아래 산국화 향기가 바람에 실려 언덕 위에 구절초에게 전해지면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지난주부터 산책로 양 쪽으로 못다 핀 봄 제비꽃들이 피어났구나. 보랏빛 제비꽃은 왼쪽으로 흰 제비꽃은 오른쪽으로 줄지어 피었단다. 가을에 보는 제비꽃은 귀해 네 잎 클로버를 찾은 것처럼 일부러 찾게 된다. 피어 있는 제비꽃을 살피다 보니 봄이라도 온 것 같아. 한참 제비꽃을 보다 공원 끝에 다다르니,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어. 연둣빛과 갈색이 섞여 나뭇잎들이 변해가고, 이미 떨어진 나뭇잎은 인도를 이미 덮고 있구나. 나무줄기 껍질도 벗겨져 수피들을 떨어뜨리니 구경거리가 많아졌어. 다시 도서관으로 가는 봉화산 산책로에 들어섰어. 숲길이 시작되는데 온통 신갈나무 잎이 바닥에 펼쳐져있구나. 갑자기 나뭇잎과 도토리까지 다 떨어뜨린 신갈나무가 부러워진다. 아이들을 다 키워 보내면 기분이 어떨까?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 부러울지 안 부러울지... 말이다. 다시 산책로를 걸어 들어가니 온통 나무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단다. 아직도 이름도 모르는 나무들이 많으니 공부를 더해야겠어.
너희들도 봉화산에서 자라고 또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지상 위에 영원한 것은 없듯이 또 사라지는 것들도 다시 산에서 작은 나무로 다시 자라나길 바란단다. 아참, 구절초가 사라진 자리에 사람들이 나무를 심었단다.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앙상한 가지에 잎이 돋아 나고, 꽃이 피어 준다면 새 친구가 누군지 알게 될 거야. 새로 온 나무들도 뿌리를 잘 내리고 너희들과 잘 지내길 바란단다. 가을이 다시 오면 나무들 틈에 구절초 한송이가 반갑게 피어주면 좋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