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알고 싶다

겨울 봉화산에게

by 무쌍


꽃이 없는 계절을 보내는 건, 아무런 일도 없이 멈춰버린 일상 같구나. 그동안 찍어둔 사진과 글쓰기가 나를 견디게 하고 있어.

별일 없이 잘 지내다가 갑자기 짜증이 나고,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어리둥절할 때가 있어. 작은 불쾌감이 커져서 종일 떨쳐지지 않아서 그런 건지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무료함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럴 땐 나는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다른 누군가에게 이유를 묻고 싶어 진단다. 또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며 위로를 받고 싶어 진단다.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은 아이의 모습이 남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

가끔씩 남편과 아이들이 엄마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슬슬 피하는 걸 보면 미안해지기도 하거든.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알고 싶다."

나는 어디쯤 서 있는지 알고 싶다

"아..! 요즘 책을 읽지 않았구나! 엄마로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면서 쉽게 지치지 않으려면 작지만 즐거운 일들을 섞어서 일상을 보내야 하거든. 책을 읽을 때는 모르지만 잠시라도 책 보는 것을 미루다 보면 늘 찾아오는 증상이란다. 꽃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과는 다른 기쁨이란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만 쫓아다니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야 하기에 책을 읽는 것은 자꾸 미루게 되지.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읽어보지도 못하고 반납해야 할 때도 있거든. 다행히도 겨울엔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책을 보는 것으로 집중하게 된단다. 꽃이 없으니 밖으로 나설 핑계도 없고, 하루 일과가 단조로워진단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살을 더 먹어야 하지만 책을 충분히 읽고 충만해지는 겨울을 보내는 것은 새해를 맞이 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한 것 같아.


어느 날 도서관 가는 길을 따라 도로포장 공사를 새로 하는 바람에 봉화산길로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단다. 봉화산엔 무장애길로 편안하게 유모차를 밀고 갈 수 있는 산책로가 만들어졌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산은 보는 것으로도 높이가 부담스러웠으니 쉽게 오르지 못했단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겨울 산이 좋아졌단다. 산을 부지런히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좀 알듯도 하구나. 구름 없이 파랗게 뚫린 하늘 아래를 걷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단다. 겨울 산은 무성한 나뭇잎을 달고 있던 나무들도 한껏 가벼워지고 늘씬한 가지를 보여준다. 팥배나무가 많은 산길은 빨간 열매로 작은 열매들은 새들을 불러 모으고 내 눈도 호강시켜준단다.
잣나무 숲 사이에 배풍등 덩굴이 제법 많은 열매를 맺었구나. 그런데 이 예쁜 배풍등 열매는 독이 있다고 하는구나. 아무도 먹지 않는 열매가 유난히 숲 입구를 붉게 반짝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람들에게 빨간 열매가 인기가 많은지 며칠 뒤에 몇 개 남지 않고 사라졌구나.

배풍등 열매


봉화산 너의 진짜 모습은 겨울 풍경인 것 같아. 가을 낙엽이 다 떨어진 산은 진짜 모습이 드러나거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산길들은 끝이 보인단다. 산 아래도 뻗어 있는 길은 다시 산으로 오르는 비탈진 길로 이어져서 능선이 훤하게 보이지. 숲이 무성할 때는 엄두를 못 내다가 새로운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새로 만나는 나무들이 보인단다. 산 중턱에 작은 다리가 있는 길도 있고 산 아래 깊게 숨겨진 화살나무가 우거진 길도 만났단다.


겨울 산에서는 하늘이 더 잘 보인단다. 산아래서 보는 하늘보다 더 환하고 투명하구나.

붉게 물든 산수유 열매가 반짝거리고 나뭇가지마다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은 바짝 말라서 바람에 거친 소리를 내고 있어. 겨울산에 나무들은 본모습이 보인다. 길게 뻗어 올린 가지들이 가장 자신답다. 군더더기도 없고 치장했던 나뭇잎들도 그저 땅으로 섞어 들어가는 시간이란다. 나무 열매들은 산에 사는 동물들의 먹이가 되고 있겠지.
겨울 산에 눈이 내리면 산을 더 숨죽여 볼 기회를 주기도 하지. 눈 덮인 산속은 고요하고 나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린단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눈을 밟는 소리는 산이 울릴 정도로 크구나. 겨울 산이 주는 적막함은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시간을 느끼게 해 준단다.
가을 동안 단풍이 지고 열매가 맺던 경쾌함은 사라지고 없어졌어. 여름 동안 소란하고 무성했던 풀벌레들도 보이지 않고, 모두 낙엽 뒤로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구나.
온전히 너를 만나는 시간이야. 산 위에 뿌리내린 나무들과 비로소 마주 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구나.
작년 겨울에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년에 다시 쓸 수 있다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어. 봉화산 너는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맞아 주는구나. 수많은 나무들과 모두 다 인사할 수 없지만 겨울 산은 모조리 한꺼번에 인사를 나눌 수 있다. 길옆에 있던 나무 들에 가려서 안보이던 숲 안쪽 나무들을 한꺼번에 줄지어 선 채 말이다. 어떤 나무는 나를 기다렸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도 해. 그 나무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졌어.
화장끼 없는 기미 낀 얼굴 단발머리, 청바지 운동화 차림에 어깨엔 무겁게 도서관에 반납할 책을 매고 걸 가고 있었거든. 나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기분이 좋아.
어린 아이처럼 빤히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날 해치려 들지 않는기분을 만끽하고 있단다.
바람이 불어 주면 나무들이 잠시 어깨를 감싸 주기도 하지.
너는 나에게 언제든 찾아오렴 하고 말을 건네는 듯 말이야. 너는 매일 찾아가지 못하지만 올라가면 확실하게 나에게 건네는 것이 있단다. 오늘은 산에서 받은 것으로 글을 쓰고 있단다. 물론 나무들과 나눈 이야기는 비밀이란다.

봉화산 무장애길에서 본 풍경


모든 것이 완벽한 날이야. 오늘은 딸과 도서관에 가기로 했거든.
해가 밝은 오후 2시 봉화산 산 허리에는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단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하얀 뭉게구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산에서 맞는 바람보다 하늘의 구름이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며 셔터를 누르는 동안에도 구름은 빠르게 달아나는구나.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늘 느끼는 나에게 구름이 잠시 부럽게 느껴졌단다.


여섯 살 딸에게 구름을 타고 가고 싶다고 했더니, 아이가 "엄마 그건 안돼 상상으로만 가능한 거야." 하며 손등을 두드린다.

곧 도로 공사가 끝이 난다고 하지만 당분간은 너를 만나러 와야겠어.

봉화산에서 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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