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또 감자탕을 해 먹을까?

자질구레 소소한 일상

by 무쌍

꼼지락꼼지락 이불 밖을 나서기가 점점 귀찮아진다. 그래도 베란다에 크는 채소들을 살펴보는 일은 빼놓을 수가 없다. 엄마는 텃밭이 있는데 자신은 없다고 심술 내는 아이에게 지난가을 작은 텃밭을 만들어줬다.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들어 있던 스티로폼 박스에 상토를 넣고, 시금치, 당근, 얼갈이배추 씨앗을 함께 심었다. 방 올라온 싹은 모두 똑같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 스타일대로 커갔다.


채소 잎을 매일 들여다봐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서 인지 점점 아이는 시큰둥해했다. 씨앗 심을 때는 그렇게 최선을 다하더니 물 주기도 관심이 없어졌다. 엄마가 대신 키우는 걸 아는지 '엄마가 물 잘 주고 있네.'라고 가끔 칭찬의 말을 해줄 뿐이었다.

얼갈이배추는 터질 듯 부풀어져서 수확이 시급해졌다. 작은 화분에서 힘들었는지 배추를 데쳤더니 너무 질겼다. 질긴 배추를 해치우려고 감자탕을 만들었다. 감자탕을 해 먹기 위해서 배추를 키운 건 아닌데, 이젠 감자탕에 넣을 배추를 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점점 집 안에서 보낼 궁리만 하게 된 듯 내 일상이 너무도 소박해졌다.

얼갈이 배추로 만든 감자탕

집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지낸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숨어 지내다가도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사소한 것에 즐거움을 찾는 일도 시큰둥해진 것일까? 따뜻한 일상을 공유하고 글 쓰는 일을 왜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온 듯 글을 썼나 보다. 누군가와 수다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들이 있었다. 내 시간을 낭비한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서 감자탕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건 내 솜씨가 좋아서는 아니다. 레시피는 쉽게 찾을 수 있고, 재료도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만들기 전엔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막상 해보니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런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글로 쓰다 보니, 내 글도 '누구나' 쓸 수 있는 소소함이 담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내 일상을 쓴다는 건 누군가와 수다처럼 느껴졌다. 매일매일 수다가 그리워 글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화분에 얼갈이배추가 자라고 있다. 배추가 어느 정도 크면 감자탕을 끓이라고 또 재촉할 것이다. 그리고 난 이런 별것 아닌 상황을 계속 만들 것이다. 소소한 것들이 매일 같이 날 지켜주기 때문이다.


여전히 글쓰기 수련은 초보 단계지만, 고독을 좋아하게 됐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고독의 시간도 늘어갔다. 숲으로 나가지 않아도 초록 배춧잎을 보면 상쾌해졌다. 별거 아닌 것에 토라지듯, 별거 아닌 것에도 웃음이 났다. 이런 내 속내를 쓰다 보니 늘 수다가 멈추지 는다.


래전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을 읽었을 때, 나도 뭔가 써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 유쾌하고 감동적인 그녀의 에피소드 때문이었다.

공장 노동자로 마로 살던 그녀가 첫 소설을 끝낸 후 아이에게 말했다.

"난 내 소설을 끝냈어."

"그래? 엄마는 누가 그걸 출판해줄 거 같아?"

" 응. 당연하지."

그녀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써오고 있었다. 언제 시작됐는지 모르는 글쓰기가 완성된 건, 이혼하고 아이들이 다 자란 후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설이 출판될 거라는 걸 한시도 의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가 출판된 소설책이 나온 지 3년 후,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 번역되어 베를린의 한 서점에 꽂혀있는 걸 아이와 함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담긴 3부작 소설을 모두 완성했다.

가는 배추를 보며 '언제 또 감자탕을 해 먹을까?' 묻고 싶었는데, 사실 궁금한 건 '언제면 나도 될 수 있을까?였나 보다. 그녀처럼 소설을 쓰는건 아니지만, 끝까지 해봐야 한다는 건 그녀에게 배웠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자질구레하고 소소한 것들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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