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착한 텃밭

베란다 텃밭상자는 초록 냉장고

솟아난 대파 vs 게으른 배추

by 무쌍

우리 집엔 냉장고가 하나 더 있다. 그 냉장고는 다름 아닌 작은 텃밭상자다. 아파트에 살지만 텃밭상자는 사계절 쉬지 않고 나를 즐겁게 해 준다.

흙에 씨앗을 넣고 키워내는 재미는 좀처럼 끊을 수가 없다. 아이가 둘인데도 빈 흙에 뭐든 길러야 직성이 풀리니 말이다. 지난가을 꽃을 키우던 화분들은 정리했지만, 텃밭 상자에 싹이 올라온 얼갈이배추를 뽑아 버리지 못했다.


늘도 눈 쌓인 창 너머, 영하의 찬 바람은 쌩쌩 매섭지만 텃밭상자는 무사하다. 밤엔 이불처럼 블라인드를 쳐주고 아침해가 뜨면 얼른 블라인드를 걷어 빛이 들어오게 한다. 고맙게도 남향인 베란다는 온실처럼 찬바람을 막아주고, 따사롭게 해가 비춘. 일주일에 한두 번 물을 줄 뿐인데, 텃밭상자는 초록 채소의 싱그러움을 선사해준다.

밭상자엔 토마토, 당근, 상추, 부추, 얼갈이배추가 있었지만 남은 것은 배추뿐이다. 배추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신이 보호를 받는 걸 아는지, 엄마 손을 잡은 아이처럼 자신감 넘친다. 누가 뭐라고 하던 "난 내 맘대로 살 거야." 라며 타고난 대로 배춧잎이 싱싱하다. 하지만 한두 번 말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아이처럼 느릿느릿 게으르다. 가을부터 청경채 정도 자란 배추는 좀처럼 크지 않는다. 엄마가 뭐라고 하는지 안중에 없고, 자기 일에 빠져 귀를 닫은 아이가 되었다. 아이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듯 배추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이보다 마가 괜히 오해하는 날도 있듯이 잠시 잊고 있었다. 겨울 베란다 기온이 냉장실 온도나 다름없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늘 초록빛으로 멀쩡하니 걱정은커녕 내 욕심을 채우려고 다그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아이 입장에선 다그치는 엄마가 좋을 리 없을 테니, 한동안 텃밭상자를 무심한 듯 모른 척 지냈다. 아이도 제 힘으로 크듯이 배추도 얼마 전부터 옷깃을 세운 것처럼 잎이 더 커지고 뻣뻣해진 터프가이가 되었다.

텃밭상자에 자라는 얼갈이배추(2022.02.05)

대파 가격이 뉴스거리인 시절이 있었다. 그땐 대파 씨앗도 없어서 못 구한다고 했었지만, 대파를 사 먹지 않았다. 누구나 한다는 대파 키우기도 하지 않았다. 뭐든 포기가 빨라서 인가. 그럭저럭 대파 없이도 살아졌으니 장바구니에 넣을 생각을 안 했다. 올 겨울은 유난히 대파를 자주 사다 먹었다. 대파 뿌리가 생길 때마다 텃밭상자 빈자리에 심었다.


물에 꽂아 대파 뿌리를 키우는 것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물을 매일 바꿔줘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다. 그런데 한 아이에게 신경 쓰느라 다른 아이가 심술이 났나 보다. 배추만 보느라 대파를 몰라라 했다. 매일 텃밭상자를 살피는 데도 대파 잎이 쭉쭉 길어진 걸 알아 채지 못했다. 배추를 추월한 대파는 마트표와 비슷하게 키가 자랐다.


대파가 솟아났다

대파 씻어 기 좋게 채를 썰었다. 국이나 볶음에 넣어 고명처럼 쓰려는 것이 아니라 대파가 주인공인 파절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고춧가루, 참기름, 소금, 깨를 조금 넣고 살살 버무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무친 파절이는 푸릇한 향내를 풍기며 코 찡하게 하는 매콤함 뒤로 찐득하게 퍼지는 달콤함이 일품이다. 특히나 대파에서 나온 진액은 입맛을 돋우며 식욕을 자극한다. 파절이는 금방 무친 것보다 하루정도 묵어서 대파 진액이 양념에 베어 촉촉해진 것이 더 맛있 듯하다.


대파 진액은 식이섬유가 들어어 소화에 좋은 투명한 시럽약 같다. 게다가 마늘처럼 알리신이 많아 항균작용을 해서 면역력도 길러준다니 말이다. 먹고 나면 매운 향이 오래 남긴 하지만 연휴 동안 몸살난 내 몸엔 파절이가 고마운 약이 된 듯했다.

냉장고 문을 열듯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대파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 가만 보니 좁은 텃밭상자에 대파와 함께 지내느라 배추가 잘 크지 못한 건가 싶었다. 다 자란 대파를 수확하면 배추들이 편해질지 모르겠다. 남은 주말 남은 대파로 파전을 해 먹어 볼까? 벌써 군침이 돈다.

역시 든든한 나의 초록 냉장고는 베란다 텃밭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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