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뒹구는 꽃잎을 보기도 전에 향기가 먼저 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연보라색 꽃송이가 떨어진 위로 긴 꼬리처럼 늘어뜨린 등나무 꽃이 보였다.
마스크를 내리기도 전에 향내가 맡아졌는데,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향수를 코앞에서 뿌린 듯 아찔해졌다. 라일락이나 장미향의 그윽하고 묵직한 향내와 달콤한 아카시 꽃향이 한꺼번에 섞인 듯 진한 향기를 갖고 있다. 작년에 등나무 꽃향기를 처음 맡아본 남편은 꽃이 질 때까지 등나무 곁을 자주 찾아갔다. 한번 맡은 향기는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황홀하기 때문이다.
등나무 잎은 한들거리며 가지를 늘어뜨린다면, 꽃은 장식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핀다. 그렇지만 꽃을 찍으려면 사다리라도 있어야 할 듯 꽃나무는 찍기 어렵다. 등나무는 덩굴이라 지지대가 필요한데, 지붕 같은 가림막을 침대 삼아 꽃을 피운다. 발끝을 들고 올려다보니 나무가 누워 있는 가림막엔 꽃이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다. 향기를 계속 맡고 싶어 한동안 주변을 빙빙 돌았다
등나무꽃(2022.04.25 @songyiflower인스타그램)
부지런히 동네 등나무를 순례했다.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등나무는 집 주면 오래된 공원에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포도송이처럼 늘어뜨리고 있는 꽃송이를 가장 가깝게 찍을 곳을 찾고 있었다. 이제 피기 시작한 나무도 있고 잎만 무성하게 꽃은 거의 보이지 않는 나무도 있었다.
투박하지만 부드럽게 휘어진 등나무가 어느새 초록으로 뒤덮은 걸 보니, 진짜 폼이 나는 건 시끄럽게 유난 떠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꽃이 풍기는 향내는 굳이 수선을 떨지 않아도 곤충들이 몰려들었다. 꽃이 풍기는 향기는 빛처럼 강렬하지 않아도 충분히 돋보였다.
손이 닿을 듯 키가 낮은 등나무를 찾았는데, 작은 컨테이너 박스와 평상 지붕을 한 몸처럼 감싸고 자라고 있었다. 나무 아래 떨어진 꽃잎을 보니 동네에서도 가장 먼저 피기 시작한 듯싶었다. 꽃향기는 그 앞을 지나는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마스크를 썼어도 다들 향기에 고개를 한 번씩 돌렸다.
등나무꽃(2022.04.25 @songyiflower인스타그램)
사진을 찍고 싶은데 문제는 등나무 아래 손님이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들이 자리을 꽉 채운채 모임을 갖고 계셨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빤히 보시는데 꽃을 찍기가 민망해졌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서야 했다. 저녁식사 전이면 다들 식사들을 가셨을까 싶어 다시 가봤다. 하지만 등나무 아래는 손님이 그대로였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줄줄이 앉아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오전엔 할아버지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교복 입은 남자 학생들이 꽉 매우고 있었다. 그래도 기웃대는 나를 빤히 보는 할아버지들 보다는 휴대폰을 보느라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이리저리 꽃을 골라 사진을 찍었지만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았다.
등나무는 꽤 오랜 시간 사람들의 안식처가 된 듯싶었다. 나무가 자리를 지키며 보낸 시간만큼, 우리도 그 쉼터에서 휴식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왠지 등나무 아래 앉을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