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마트엔 목소리가 좋은 직원이 있다. 웃는 눈에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듣기 좋아 일부러 그분이 있는 계산대에 줄을 선다. 그 다정한 음성을 듣고 싶어서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리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분은 기다렸다는 듯 "어서 오세요."라고 대답했다. 우린 평소 그렇게 인사를 나눈다.
피곤해 보이는 날도 같은 목소리인걸 보니 그분은 목소리가 딱 타고 나신 모양이다. 일부러 그런 음성을 내지 않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했다. 다른 분들과 긴 이야기 나누는 목소리도 한결같기만 하니 말이다.
모두 집에 머물던 시간엔 마트가 가장 번잡스러웠는데, 요즘 들어 마트가 한산하다. 장보기는 수월하지만 자꾸만 치솟는 물가는 불편했다. 마트 안을 빙글빙글 돌며 둘러보다가 초당옥수수 세일이 눈에 띄었다. 지난번에 사다 먹은 것보다 절반값이니 그냥 가면 섭섭할 듯했다. 식구 수만큼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줄 선 손님이 없어서 인가? 목소리 좋은 그분이 말을 걸었다.
"초당 옥수수 어떻게 드시는지 아시죠?"
"..."
"삶지 말고 그냥 생으로 드셔 보세요. 더 맛이 좋답니다."
"아.. 네."
생각지 못한 말을 들으니 입이 굳어 버렸나 보다. 영수증을 받으면서 감사 인사 어색하게 하고 마트를 나섰다. 인사만 하다가 옥수수를 색다르게 먹는 법을 알려준 그녀가 왠지 고맙고 친근했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수년 전이다. 초당옥수수를 농사하신다는 분이 여름휴가를 간 제주집에 찾아오셨다. 먹으면 생각날 거라며 노랗고 통통하게 생긴 옥수수 한 봉지를 두고 가셨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소금만 약간 넣어 삶았는데 정말 달콤했다. 옥수수 하나도 제법 커서 먹고 남은 건 볶음밥을 해 먹었다.
그리고 다음 해엔 돈을 주고 판다고 연락이 왔다. 처음엔 개당 삼백 원이라고 하더니 다음 해엔 오백 원씩 받으셨다. 계속 매년 가격이 올라 개당 천 원을 달라고 하자 그만 먹자 싶었다. 제주 초당옥수수가 인기가 많아지고 재배농가가 많아지며 그분도 크게 돈을 버신 모양이다. 옥수수를 사 먹으라고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한참 전에 일이지만 그땐 옥수수를 생으로 먹어 보란 소리는 듣지 못했다.
옥수수를 생으로 먹어본 듯한데 언제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초당 옥수수는 아니지만 아빠가 키운 옥수수였나보다. 아빠의 귤밭 비탈진 땅에 옥수수를 늘 키우셨다. 막 수확한 옥수수를 아빠는 껍데기를 벗기고, 후후 불더니 그대로 입에 넣으셨다. 나도 따라먹긴 했는데 꼭 옥수수수염과 껍질을 빨아먹는 기분이었다. 향기는 옥수수인데 맛이 텁텁했다. 먹다만 옥수수를 슬그머니 옥수수가 쌓여 있는 틈에 숨겨버렸다.
옥수수를 삶으려고 씻어 찜통에 넣는데 생 옥수수 맛이 궁금했다. 예전에 먹던 옥수수와는 다르니 맛도 다르겠지 싶었다. 방송에서 생으로 맛있게 먹는 걸 본 적도 있는 것 같은데 막상 먹으려고 보니 어색했다. 한알을 입안에 넣었는데 금방 다시 먹고 싶었다. 입 안에 퍼지는 옥수수 향 너머 생밤과 생고구마의 맛이 섞여서 신선했다. 고소한 과일을 먹는 기분이랄까. 먹다 보니 옥수수 한쪽이 비어 허전해졌다.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맛을 즐겼으니 옥수수는 원래 먹던 대로 익히기로 했다.
초당옥수수는 가족이 모두 좋아한다. 막내는 젓가락을 들고 와 옥수수 심에 꽂아 후후 식혀가며 먹는다. 입이 짧은 큰 아이도 옥수수를 들었고, 꼼꼼한 남편은 깨끗하게 먹고 심만 남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옥수수를 배불리 먹었는데, 찌기 전 먹었던 생 옥수수가 생각났다. 당근은 익힌 맛보다 생 당근이 좋은데, 초당 옥수수는 어느 쪽이 더 맛이 좋은지 모르겠지만, 생 옥수수를 또 먹었으면 싶었다. 다음에 장을 보러 가면 생으로 먹을 옥수수를 몇 개 더 사야겠다. 앞으론 초당옥수수를 두 번 먹어야겠다. 한 번은 생으로 먹고 두 번째는 익혀서 먹어야 하니 말이다.
어제 남은 옥수수 반쪽을 아껴가며 먹고 있는데 마트에서 세일 안내 문자가 왔다. 세일 목록을 보니 초당옥수수가 어제보다 더 싸게 판다고 한다. 장맛비가 머물고 있는 하늘을 보며,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