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은 묵직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대출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장편소설 3권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추리소설 독자들을 배려해 다른 필명으로 출판되었던 책인데, 나는 이제야 읽게 되었다.
그녀는 쓰고 싶었던 글이 많았던 것 같다. 로맨스 소설도 썼고, 중년 여성의 내면을 써 내려간 자전적인 소설도 있었다. 탐정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작가라고만 알고 있었지만, 책을 보니 그녀의 내면에도 수없이 파도가 치고 있었나 보다.
사실 그녀의 추리소설에도 복잡한 내면묘사는 등장한다.
특히 어머니와 딸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이 소재가 된 적은 많다. 권위적이고 냉정한 엄마가 수줍은 딸에게 아무렇게나 질책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그렇지만 딸이 원하는 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딸과 화해하는 모습은 공식처럼 마무리된다.
추리소설이 아니어서인지 한 장 한 장 넘기며 금방 한 권을 읽어버렸다. 나와 다를 것 없는 '중년의 여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복잡한 내면을 구구절절 읽어서 일까? 세 권을 빌려왔지만 한 권을 읽고 나니 속이 더부룩했다. 수줍고 겸손한 그녀의 글에선 마플이나 포와로가 하던 추리는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들은 숨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죄를 짓거나 숨기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서로 짜증을 내고 싸우거나, 잔뜩 눈치를 보는 장면들이 많았다.
범죄는 일어나지 않지만 책 속의 그녀는 남편, 어머니, 가족들의 시선에 대한 긴장감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들 사이에서 또 무언가를 이루고자 애쓰고 있었다.
"사람이 들이 책을 쓰라고 나를 몰아 댔다.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날 뒤흔들었다. 다른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메리 웨스트 매콧이란 필명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아가사 크리스티-
그녀는 섬세하고 비범한 작가였다. 추리소설 독자들의 눈을 피해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완성했다. 모든 것은 책에 관여한 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결국 비밀은 공개되었지만, 예리한 추리소설 작가인 그녀는 모든 것을 예상했을 듯했다. 범인이 누군지 예측해보는 것이 익숙한 독자였던 내가 내면 조각들을 쓰고 싶던 그녀의 삶을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원한 것을 은밀하지만 자신 있게 해낸 듯하다.
그녀는 메리라는 이름으로 추리 소설이 아닌 6편의 소설을 완성했다.
글을 쓰다가도 책상을 벗어나 밖으로 향하는 충동을 느낀다.
좀 벗어나고 싶었다. 잠시라도 기분 좋은 순간을 느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동네를 오가는 일이 전부였고, 끄적거리는 문장 사이사이에 꽃을 꽂아두며 완성하고 싶었다. 꽃의 힘을 빌려와 자연스러운 문장들을 만들어 보려 애쓰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키는 대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쓰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사람들 눈을 피해 사라져 버렸던 실종 사건은 유명하다. 나도 그녀처럼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날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처럼 호텔에 오래 묵을 만큼 돈이 담긴 지갑이 없지만 말이다. 물론 그녀가 당시 어머니를 잃고,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정신적인 충격으로 벌어진 복잡한 사건이라 안타까웠다.
멀리 영국에 살던 작가가 남긴 책의 의미를 더 분석해보고 싶었던 것이 문제였나 보다.내가 읽고 싶었던 건 그녀의 소설이 아니라 그녀가 작가로의 삶이 었으니 말이다. 소설을 즐기는 건 충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언젠가 나머지 소설을 다시 펼쳐볼 날을 기약했다.
책을 반납한 가방이 헐렁해서 일까?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 온 뒤 깨끗해진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꽃이 보이면 사진을 찍으며 느린 산책을 즐겨볼 참이었다.
참나리 꽃 군락지가 보여 그 앞으로 갔는데, 단잠을 자는 고양이를 만났다. 폭신폭신 상태가 좋은 침대도 아닌데 어쩜 저렇게 편안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낡고 허름한 난간에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뒷다리를 길게 뻗고 꼬리까지도 툭 던져둔 채 잠을자고 있었다. 웅크린 채 자는 길고양이들은 보았지만 길게 쭉 뻗은 다리로 자는 모습은 낯설었다. 참나리꽃을 찍어야 하는데 고양이가 깰까 신경이 쓰여선지 꽃보다 고양이를 먼저 찍었다. 사진을 찍는 둥 마는 둥 하고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멀리 영국에 살던 작가의 삶도 길 위에서 만난 고양이 하루도 나와는 달라 보였다.
자신감, 내겐 그것이 부족했었나 보다. 여전히 나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책의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읽듯, 참나리꽃과 고양이를 들여다보았다.
탐정이 안 나오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책 때문인지, 보송한 침대에 누운 듯 편히 자는 길고양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쓰고 싶은 충동이 느껴져 서둘러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