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떨어진 건 낙엽만이 아니다

가을 청단풍

by 무쌍

글쓰기도 몸에 붙는 근육이 맞나 보다. 운동처럼 꾸준히 한결같이 붙들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 미루다 보니 멀어져 버렸다. 대단한 걸 써보겠다고 시작하지 않았지만 매일 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첫 문장을 시작하지 못했다.

설거지나 집안 청소보다는 글쓰기가 훨씬 좋았는데, 요새는 밀린 설거지가 있으니 핑계가 되어 나쁘지 않다. 일 년 넘게 드나들던 상담실을 끊고 나니 하소연할 일도 없어진 걸까? 마음의 해방은 두 다리도 가볍게 해 주었는지 자꾸만 밖으로 몸을 데리고 나갔다.


무엇이었을까? 문득 동화책 속에 주술사의 저주가 풀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야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장면이 떠올랐다. 억울함과 증오, 공포가 뒤덮던 과거를 벗어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기루였나 보다. 야수가 아니었지만 내 모습은 추하고 초라했다. 나만 아는 죄책감의 감옥에서 나와 떳떳하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깨에 뭉친 근육이 사라진 건지 묵직하게 누르던 책임감의 무게도 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달라진 건 내 마음뿐인데도 주변의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아침 산책길에 청단풍나무 아래는 여러 가지 색을 한 낙엽들이 보였다. 오래된 상처에 완벽하게 선을 긋고, 가려졌던 욕망을 꺼내보는 연습도 더는 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툭하고 떨어진 낙엽처럼 하나둘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들을 들여다보는 듯 느껴졌다. 갈색 잎은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던 나, 노란색 잎은 내 탓이라고 나만 잘하면 된다고 체념하던 나, 초록색 잎은 버려질까 봐 본심을 숨기던 나, 그런데 붉게 물든 청 단풍잎은 다르게 보였다.

전히 애쓰고 있는 나 같았다. 그렇지만 과거를 붙들며 안타까운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새로 시작한 하루를 잘 보내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떨어진 낙엽들이 모두 곱게 보였다.


나에게 있던 나쁜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싶다고 했지만, 기억이 없다면 나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지 않은가. 앙갚음을 하고 싶던 분노도 낙엽처럼 떨어져 저만치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 사랑받았다고 믿을 만한 장면을 더듬어 보려고 했었다. 결국엔 그런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대신 다른 것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오랜 기억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눈에 띄게 되었다. 떨어져 간 감정들은 나씩 새로 태어난다. 청단풍이 재각각 다른 속도로 물들어 가고 있는 동안 기억도 하나씩 글이 된다.


가을 국화가 피었고, 단풍이 물들어간다. 공식적으로 가을이라고 선포하지 않아도 계절은 분명해졌다. 과거를 놓지 못해 생긴 아픈 상처는 회복이 너무 느려 더디게만 느껴졌지만, 마음의 치유라는 결실을 앞두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글쓰기는 그 모든 것을 속도감 있게 나를 붙잡아 주었고, 누구보다 확실하게 응원해 주었다.


지난가을엔 마음의 상처들이 너무도 많이 생각나 수북이 쌓인 낙엽처럼 걷기 불편하고, 발바닥에 단단히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글을 쓰고 나서 다시 만난 가을은 뭔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가을 낙엽이 툭 툭, 떨어지듯 내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들도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나 보다.


완연한 가을, 떨어진 건 낙엽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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