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는 것이 맞았다. 지난봄 텃밭상자에 심은 오이 씨앗이 토실하고 길쭉한 오이가 되었다. 텃밭 대신 텃밭상자를 아파트 베란다에 두고 소꿉놀이하듯 채소를 키웠지만 이렇게 흥분한 건 처음인 듯싶다. 착한 텃밭 상자는 이번에도 내 소망을 이루게 해 주었다.
오이 키우기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다. 뿌린 씨앗은 절반만 발아를 했고 다행히 4개의 모종으로 자랐다. 잎이 돋고 덩굴손이 뻗으며 자라더니 귀엽고 노란 꽃 수꽃이 피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되자 덩굴이 더 풍성해지고 잎이 손바닥처럼 커지자 암꽃도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했다. 작은 오이 열매 끝에 피는 노란 암꽃을 보며 앞으로 수확할 정도로 커질 오이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초록빛 기대도 잠시였다. 오이 열매가 자라길 간절히 기다렸지만, 연녹색의 작은 오이는 더 자라지 못하고 꽃잎 색처럼 노랗게 시들어 버렸다. 그리고 곧 갈색 낙엽처럼 말랐다. 몇 번이나 그 모습을 지켜봤는지 양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처음엔 사진도 찍고 꽃이 핀 날짜도 적어 두었지만, 반복되는 모습에 익숙해져 버렸다. 사실상 오이 키우기는 실패였다. 그렇다고 병충해가 있거나 시들해지지도 않은 오이덩굴을 뽑아버리긴 아쉬웠다.
오이덩굴이 여름방학을 한 두 아이와 보내는 소란스러운 일상과 집안에 갇혀 지내는 답답함을 잊게 해 주었으니, 고마운 친구 같았다. 여름 내내 심심치 않게 꽃을 보여주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베란다를 초록 잎으로 가려주며 시원한 기분을 들게 해주기도 했다.
암꽃이 오이열매를 보여주었지만 시들어버렸다 (22.08.10)
그러던 어느 날 꽃 하나 지고 열매가 통통해지더니 7센티 길이가 되었다. 열매는 휘어지지 않고 아래도 길게 뻗으며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설렘도 잠시였다. 일주일 넘게 폭우가 쏟아지더니 습한 기온에 오이도 견디지 못하고 노랗게 마르기 시작했다. 비가 그칠 때 즘엔 예전 모습은 온대 간데없고 낙엽처럼 바짝 말라버렸다.
섭섭하기도 하고 자신이 없어져서 오이 키우기를 포기하고 얼갈이배추나 심어볼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뽑으려고 보니 오이는 가시덩굴이나 다름없었을 정도로 가시가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뽑는 일도 쉽지 않을 듯했다. 새로 핀 노란 수꽃이 웃고 있어서인지, 가시가 달려서 인지 선인장처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말복이 지나자 날씨도 맑아지고 선선해졌다. 별일 없던 오이덩굴에 암꽃 피기 시작했다. 유난히 꽃잎이 크게 피었다 싶었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오이 열매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만에 길고 통통하게 자랐다. 큰 아이는 오이를 보더니 마트에서 파는 오이랑 모양이 똑같다고 웃었다. 둘째는 오이로 무슨 요리를 해줄 거냐고 물었지만 금방 대답을 못했다.
요즘 나는 남편이든 아이든 눈만 맞으면 오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결과를 늘어놓는다. 자랑하지 않으려고 말을 돌려서 해보지만 입이 근질거려서 어쩔 수 없다. 아이들에겐 자랑한다는 것이 좋지 않은 모습이라 가르치면서도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텃밭 상사를 들여다보며 흥분되고 자신에 찬 기분을 참지 못하고 매일같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 혹시라도 모종이든 종자든 심고 키우는 재미를 아는 분들이라면 나의 흥분상태를 이해해주실지도 모르겠다.^^;
오이로 자란 암꽃(22.08.15)/ 통통하게 자란 오이(22.08.25)
드디어 두 아이가 개학을 했다. 등교한 아이들 덕분에 오랜만에 몸이 한가해졌다. 홀로 남은 나는 최대한 게으름을 피우며 고독을 붙잡고 싶었다. 집안일은 밀렸지만 노트를 끄적거리며 찍어둔 사진을 뒤적거렸다.
가장 먼저 나를 부추기며 등 떠미는 건 텃밭상자에 초록색 오이였다. 여름 끝에 달린 오이 하나가 내게 전해준 이야기는 '어떤 일도 끝까지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방학이 끝난 아이들은 학교로 갔지만 나의 글쓰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