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기다렸다. 장맛비가 그친 중랑천 공원에 코스모스 씨앗을 심었다는 작은 팻말을 보았다. 새싹이 올라와서 기뻤고, 꽃봉오리가 만들어지는 걸 보며온 사방이 환하게 꽃잎들로 가득 차길 기다렸다.
황화코스모스와 함께 찾아온 가을 태양은 너그러웠다. 코스모스가 만발한 꽃밭에선 태양도 꽃들보다 못한 듯 힘이 빼고 있었다. 눈이 부신 건 코스모스가 만든 물결뿐이었다. 꽃 사진을 찍는 나는 어느새 봄꽃을 찾으며 하던 일들을 마무리를 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었다. 꽃밭을 바라보면서도 지난 계절에 보았던 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봄에는 집 앞에 벚꽃이 피기 기다렸다. 여름 꽃들은 기다리지 않아도 시작이 빨랐다. 봄망초가 피기 시작하자 루드베키아가 피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은 장맛비에 자꾸만 쓰러져서 우산을 들고 매번 그 앞을 서성이게 했다. 그래도 태양을 꼭 닮은 여름꽃은 열정과 뒷심이 좋다.백일홍은 힘이 빠졌지만 능소화와 루드베키아, 해바라기는 지금도 피어 있다.준비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떠나려는 듯 아낌없는 마음이 느껴졌다.
차례를 지키며 피던 야생화들 중에도 순번이 늦은 가을꽃들은 봄 여름에 비하면 가짓수가 많지 않아서 일까. 아무렇게나 핀 다른 야생화들을 찾기보다는 눈앞에 핀 황화코스모스를 더 들여다보게 했다. 아직 산국화가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았고, 덤불숲엔 나팔꽃이 바글바글 피었지만 계절의 끝을 향한 것은 분명했다.
중랑천 황화코스모스 길(2022.10.02)
꽃을 따라 계속 걸었다. 촘촘하게 노란색과 주황색을 오가며 일렁이는 코스모스는어딘지 모르게 8월의 태양을 떠올리게 했다. 바닥을 빼곡하게 채운 꽃잎들은 강바람에 서늘해진 몸을 감싸며 미지근한 온기를 느끼게 했다.
올해도 내 생일 휴가는 하루 종일 걷는 일에 몰두했다. 새벽에 집을 나서서 저녁때가 될 때까지 중랑천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처음엔 꽃을 보려고 시작한 걷기 여행이지만, 매년 8월의 마지막 주중에 하루를 가족이 없이 홀로 시간을 보낸다. 하루 종일 걸으면서 빛나는 태양이 내리쬐는 대로 몸을 달구는 기분을 만끽한다. 맨 처음 세상으로 나왔던 계절을 몸이 기억하는 걸까. 늦여름에 공기는 고향으로 나를 데려가는 듯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혼자 걷기는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즐기게 한다. 마치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책장을 넘기는 듯 발걸음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보이는 것이 모두 선명한 길로만 걸어 다니고 싶었다. 사실은 밝은 곳으로 나서는 일이 부끄러웠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늘 뒤로 숨어 버리고 싶은 날들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꽃밭을 한참 서성거리다 보니 사진을 찍어달라는 손길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진을 찍어 주고 나면 그들은 내게 감사 인사와 함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말을 했다.
"코스모스가 너무 예뻐서요."
꽃밭에서 포즈를 잡으며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부담스럽지만,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즐겁다. 꽃이 핀 곳은 어둡지 않아서 일까, 태양이 내리쬐는 빛은 모두에게 공평해서 일까. 내 안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꽃밭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꽃이 너무 예뻐서 더 이상 그늘 뒤로 숨어 있을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