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무덤을 지키는 제비꽃

그루터기

by 무쌍

나무가 자꾸만 사라졌다.

땅이 녹고 매화꽃이 피면서부터 하루 멀다 하고 정원수들이 뽑히거나 잘려 나간다. 산책을 나설 때마다 마음을 단단히 해야 했다.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 말이다.


앙상하게 회색으로 마른 회양목은 푹 들어간 구덩이를 두고 갔다. 울타리마다 난 구멍을 하나 둘 세다 보니 집에서 한참 멀어져 버렸다. 회양목처럼 작은 나무는 뿌리째 뽑아내면 그 자리는 새 묘목이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다른 나무들도 있다.


로 키가 큰 나무들이다. 얼핏 보아도 지름이 30cm 이상 되는 고목들은 정한 크기로 토막 내더니 실려 나갔다. 남은 그루터기 그대로 두거나 약품으로 칠이 되는 것이 마무리다.

산책로가 환해졌다 싶었는데 오늘도 그루터기가 생겼다.

기계톱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벌써 벚나무와 느티나무가 렸다. 지난주에 본 그루터기까지 합하면 족히 서른 그루는 되는 듯싶다. 작년에도 잘린 나무가 많았는데, 내년엔 얼마나 더 잘려나갈까?


미국에 살던 소로 아저씨라면 잘린 나무의 나이테를 세고 있을 텐데, 다음 산책엔 나도 세어봐야겠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맑은 공기를 다 가져가버린 걸까? 산책로는 유난히 뿌옇게 먼지가 낀 듯 답답한 공기가 느껴졌다.


처음은 작은 묘목이었을 텐데 주변 건물보다 키가 자란 나무는 쓸모가 없나 보다. 어떻게든 나무 자르는 걸 말리고 싶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지만 말이다.

그루터기와 제비꽃, 종지나물(2023.03.28)

금방 잘린 그루터기엔 작은 야생초들도 없지만, 세월이 흐른 그루터기엔 작은 꽃들이 핀다. 무덤가에도 많이 피는 제비꽃은 나무 무덤에도 있었다. 언제 잘렸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돌처럼 굳은 그루터기엔 종지나물과 제비꽃이 한창이었다.

그루터기와 제비꽃(2023.03.28)




나무 무덤을 찾아다녔더니 아버지 산소가 생각났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해에 태어난 프랑스의 시인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도 다시 펼쳐 보았다.


우리들 중 이 나무를 없애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내 일을 하는데 이 나무가 필요합니다. 매일 잎사귀들을 들여다봐야 해요. 나무는 이 건물의 첫 거주자이고, 수령은 존중받아 마땅해요. 장담컨대 노인들이 우리에게 그늘을 지게 한다는 핑계로 그들의 다리를 자르지는 않을 거예요. 잎사귀 하나라도 먼저 건드리는 사람은 저를 상대해야 할 겁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특히나 침묵을 지키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보뱅이 쓴 <가벼운 마음>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이다. 대단한 작가인 그가 부러웠다. 물론 책 속이지만, 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을 수 있는 권위 있는 사람이 되면 막을 수 있을까? 잘린 나무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아님 주인이 없는 나무라서 잘려나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보뱅은 아쉽게도 작년(2022년) 별세했다. 프랑스에 태어난 그는 작가의 유명세는 뒤로 하고, 고향 근처에 숲 한가운데 있는 집에서 글을 쓰는 일에만 일상을 보냈다고 해서 더 관심이 갔다.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문단에서도 존경받는 그가 얼굴도 잘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고독하게 지냈다니 말이다. 시인이지만 그의 수필은 출간될 때마다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위대한 시인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낯선 작가였다." 고인을 기리는 말이었다. 나도 그를 알게 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작가가 남긴 책을 펼쳐 들었을 땐 그가 아닌 그녀라고 믿었다. 책 속의 화자가 대부분 여자라서 그랬는지, 에밀리 디킨스를 위한 <흰 옷을 입은 여인>을 썼다는 것만으로 판단해 버린 나는 형편없는 독자였다.


국내에 출간된 수필집 읽기 시작했는데 , 자꾸만 감정이 울컥해져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렀다가 툭하고 놓아 버리는 듯 한 그의 문장들이 날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길고 부연설명이 된 글 말고 그냥 내뱉고 싶어졌다. 가 쓴 단문들은 모두 시의 구절 같았다. 그가 쓴 시는 읽어 보지도 않았는데, 그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침 해가 뜨자 또다시 그루터기를 찾아다녔다. 아버지처럼 젊은 나이에 떠난 나무들은 더 이상 새싹이 나지 않는다. 대신 그루터기 주변은 작은 야생초들의 천국이다. 새로 생긴 그루터기는 묘비명도 없고 풀 한 포기도 없지만 곧 제비꽃이 지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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