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떨어진 꽃잎

by 무쌍

먹구름이 빗물을 시끄럽게 쏟아내더니,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곳이 있어서 인지 그쳐버린 비가 반가웠다.


부랴부랴 다 읽은 책들을 가방에 넣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그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길가의 꽃들도 궁금했다.

꽃 화단이 잘 가꾸어진 집들을 따라 걷다 보면 도서관을 가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두 번의 여름을 보내고 나니 도서관 가는 길엔 봄보다는 여름에 꽃이 많이 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낙비에 쏟아져버린 봉선화 꽃잎을 보니 금방 자리를 뜨지 못하고 사진을 찍었다. 모퉁이를 돌면 2층 정원에 참나리와 플록스가 고개를 내밀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말이다.


얼마 전까지 공사를 하던 새로 만든 정원엔 클레마티스와 산수국이 피기 시작했다. 늦봄 으름덩굴 꽃이 담장 가득 핀 집은 얼굴만 한 잎을 뻗은 아욱 줄기가 대롱거리듯 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빌라 입구에 도라지 꽃이 가득했던 화단엔 범부채꽃과 해바라기가 피었고, 담장을 따라 보라색 나팔꽃은 더욱 덥수룩해진 초록잎이 차란거렸다.




서관을 갈 때마다 그 집 앞을 지나간다.

2층 단독주택이다. 2년 전엔 그냥 평범한 집이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온갖 플라스틱 통이 쌓여갔다. 대문 앞엔 색깔별로 정리되었고, 서랍장이 하나 놓이더니 수납장처럼 물건들이 채워져 갔다.

2층 계단 난간에도 비슷한 통들이 늘어갔다. 그런데 올 해는 수집품이 바뀌었다. 빈 화분이 쌓이고, 식물이 죽어 버린 화분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런데 오늘 대문 위에 줄 세워진 화분 중 하나에 꽃대가 올라왔다. 호접란 같은데 대롱대롱 달린 꽃송이가 탐스럽게 보였다. 화초가 죽은 듯했지만 살아난 것들도 있고, 화초 대신 망초 같은 야생초가 주인이 된 화분도 있었다. 계단마다 화분이 놓여있고, 2층 옥상에는 더 많은 화분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화분을 세어보려 했지만 이미 서른 개가 넘었고, 더는 가늠할 수 없었다. 집안엔 누가 사는지 모르지만 대문을 열기도 불편할 만큼 집엔 수집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미국의 팝아트의 대가라고 불리는 앤디 워홀은 탁월한 감각으로 중의 사랑을 받았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고하게 만든 그지만, 그가 남긴 것은 어마어마한 수집품들이었다. 피카소의 그림이 빈 쇼핑백 틈에 있었고, 보석들이 처박혀 있던 침대 근처엔 쿠키 틴케이스가 175개나 나왔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 빈 상자를 좋아했는데, 모든 물건들을 그 안에 넣었다고 하니 수집과 저장강박을 오가며 꽤 많은 물건을 수집했을 듯싶었다.


앤디 워홀은 어린 시절 가난했던 시절 때문에 저장강박증을 증세 갖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수집한 물건 중엔 대단한 안목으로 구입한 고가의 예술품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꼭 강박증이라고 하긴 어려워 보인다. 무조건 물건을 버리지 않는 증상은 '불안'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보통은 갑작스러운 이별이나 충격으로 인해서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모으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수집품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수집에 가깝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장강박증에 가깝다. 일단 버리지 않고 모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 집 앞을 지나면 나 역시 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젠 그만두어야지 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그리고 유명한 화가도, 그 집주인도, 나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우린 무언가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일까? 길가의 꽃을 좋아하다 보니 집안 베란다 화분 욕심이 많이 줄었다. 매일 살피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만큼 실패도 많이 맛보다 보니 식물을 늘리려는 마음은 더 소박해진 듯싶다. 빗물에 쏟아지듯 떨어뜨린 봉선화 꽃잎들이 부럽기도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과거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미련한 마음을 서성이며 버리지 못하는 나도 이해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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