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으려니 끝이 나지 않을 듯하고, 화단에 이름이 있다면 써줄 텐데 이름도 없다.
내게 있는 건 주소지와 화단 관리 목록 숫자뿐이다.
정말! 진짜! 나무들은 내게 멋진!? 선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우후죽순, 대나무는 정글처럼 새 잎으로 뒤덮였고, 산딸나무는 동글동글 붉게 익은 열매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지가 길게 늘어지고 잎이 커진 오디나무 그늘 아래에 섰더니 초록색 우산을 쓴 기분이었다.
라일락은 지난달 잎에 번진 벌레들을 처리하느라 남은 잎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라냈지만 어느새 짙은 초록잎 돋아나 복구되었다.
일주일 만에 우람해진 나무들을 보니 건강해 보여 안심이 되었지만 할 일이 많았다. 천천히 주변 정돈이나 하면서 도란도란 수다를 떨어 볼까 했는데, 한가하게 보낼 시간은 없었다. 땀범벅이 되게 몸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잡초 뽑기만 하면 수월하겠다 싶었는데, 평소 작업 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람이 참 마음이 이상했다. 막상 그만 두려니 가치 치기 하는 손에 더 정성이 들어갔다. 앞머리가 내려오면 눈이 찔리고, 귀를 덮어 답답해 보이는 아이를 보듯, 처음 만난 날처럼 나뭇가지를 다듬어 주었다.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게 원하는 스타일로 맞추어 주고 싶었다.
요리 저리 튀어나온 가지들을 다듬다 보니 봉투가 꽉 찼다. 지난봄처럼 말끔해진 나무를 보니 커트를 막 하고 짧아진 머리카락이 어색한 아이를 쳐다보듯 웃음이 나왔다.
오디나무는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를 제외하고 아래로 처진 것들은 싹 잘라냈다. 출입문 근처라 사람들이 드나들며 닿지 않을 정도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늘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문 앞이 훤해졌다.
내년 봄에도 '오디 열매가 열리겠지?' 또 한 번 피식 웃음이 났다.
지난봄 산딸나무는 꽃을 많이 보여주지 않았는데, 열매는 다른 나무에서 떨어졌나 싶을 정도로 많았다. 열매가 대부분 쪼개져 있었지만 바짝 말라 작아진 열매도 보였다.
바닥을 쓸려고 빗자루를 들고 오긴 했는데, 뭔가 홀린 듯 그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기념품으로 가지고 가야겠다.'
산딸나무 열매는 내가 화단을 오가는 3개월 동안에 의미가 있었다. 하얀 꽃이 피었을 때 처음 만났으니, 떠나는 내게 주려고 준비한 듯싶었다. 초록색이 남아 덜 익은 듯 열매는 물러지지 않았고 단단했다.
산딸나무 열매
뾰족하게 튀어나온 모양 하며 붉은색으로 익는 열매가 산딸기를 닮아서 산딸나무라고 불린다. 산딸나무 열매는 독성이 없고, 새들에게 인기가 많고 사람도 먹을 수 있다. 망고맛과 비슷한 맛이 난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 적은 없다. 특별한 냄새는 없어서 동네 떨어진 열매를 주워온 적이 있는데 이 기념품도 한동안 책상 위에 두고 보고 싶었다.
땀을 닦던 손수건에 올려 가방 안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갖고 오다가 뭉개질까 싶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식물을 좋아만 해 봤지 일로는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이번 일로 얻은 경험을 잘 가지고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견뎠다고 자연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중랑천으로 주말 산책을 나섰다. 오랜만에 찾은 공원엔 한눈에 봐도 붉은 열매가 잘 익은 산딸나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동네엔 산딸나무가 제법 많았다. 매일 마주치지는 않지만 자주 만나는 나무 중에 하나였다. 기념품으로 산딸나무 열매는 가지고 오지 않았어도, 산딸 나무 열매는 볼 수 있었다.
산책로에 뒹구는 열매는 주황색, 붉은색, 분홍색 여러 가지 색으로 크기도 컸다. 산책로에도 누군가 와서 치우겠구나 싶었다. 잠시 다녀온 산딸나무 화단이 슬쩍 떠올랐지만, 늘 곁에서 보고 있는 듯 아무렇지 않았다.
일로 만난 사이가 오랜 인연이 되기는 쉽지 않은데, 나무라서 다행이었다. 특히나 식물은 나와 궁합이 잘 맞는 편이다. 관심을 두고 보살피는 일이 즐거운 내 적성에 딱 맞기도 하거니와, 예상치 못한 상황을 연출해서 나의 소소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자연이 가진 재능 때문이다.
운동하듯 걷지 않고 느릿느릿 놀며 걸었더니 산딸나무 열매가 없는 곳이 없었다. 더 이상 못 보겠구나 싶었지만, 초록식물들이 늘 곁에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일로 만난 나무들도 조경이 잘 된 공원에만 가도 다 심어져 있는 수목들이었다. 겪어보는 것과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정말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용기가 안 나서 시간이 없어서 기회를 잡지 않았던 것도 인정해야 했다. 산딸나무 열매가 익어가는 동안 나는 글쓰기는 멀어졌지만, 현재에 몰입해야 하는 이유를 더 깊게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미래에 벌어질 기대감에 희망을 걸고 살았나 보다. 막상 해보니 식물들과 잘 지내지도 못했다.
희망을 품고 상상하는 마음을 먹을 때마다, 이미 즐거움을 다 맛을 본 모양이다. 상상했던 것만큼 즐겁지 않았다. 환상이 자꾸 부풀어 올라서 다시 작아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일터에선 환상은 거품 같이 사라졌다. 계절이 전해주는 자연의 기념품은 대단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산딸나무 열매 하나를 기념품으로 여긴 건,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나무가 꽃으로 열매로 나에게 보상을 해주었다는 위로였다. 실망감이 들수록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그리고 미래의 기대를 자주 떠올리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념품으로 가지 온 산딸나무 열매가 납작해져서는 딱딱하게 굳어간다. 복잡했던 나의 경험담도 함께 화석처럼 남았지만 불편했던 감정들은 이미 공기 중에 사라져 버렸다.
식물들과 함께한 시간은 낯설지 않았고, 자연은 있는 그대로 해롭지 않았다. 다음은 어떤 기회가 날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모른 채로 멈추기로 했다. 내게도 가을이란 계절이 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