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한 쪽파 한 단

파김치의 효과

by 무쌍


머뭇거리다가 쪽파 한 단을 들고 왔다. 옆에 말끔하게 다듬어진 쪽파가 있었는데, 영 내키지가 않았다. 장을 보러 갈 때는 도 털어내고 뿌리와 겉껍질도 싹 정리된 다듬은 쪽파를 사 오려고 했는데 또 마음이 바뀌었다. 흙 뭍은 뿌리 그대로 묶음 쪽파를 사들고 왔다.


나는 또 왜 그랬을까. 어쩌면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싶다. 매번 바꾸어 보겠다며 '다음부터'라는 단서를 달지만 내 스타일은 늘 같은 것을 고수한다. 쪽파 한 단에 무슨 의미를 거창하게 붙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만사가 그렇다.


괜찮아라는 말을 자주 하다 보면 진짜 안 괜찮은 상황일 때도 '괜찮다'하는 편이 쉬워진다. 착한 아내 컴플랙스는 좀처럼 벗어던지기 쉽지 않다. 혼자 알아서 한답시고 결정은 내가 하고는 도중에 화가 나버렸다. 말을 하지 않으니 상대방이 알리가 없지만 말이다. 남편에게 '다음부터는 고쳐볼게'라고 똑같은 말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을 옆에 두고 지낸다는 건 아무 때나 말을 걸면 안 되는 사람하고 사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벌어지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집에 있지만 나는 묵언수행하는 듯 집안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마트에서 들고 온 쪽파 한단이 너무 고마웠다.



신문지를 펼치고 묶은 머리를 풀어놓았다. 쪽파 뿌리는 짧은 더벅머리처럼 까슬했지만 손에 닿는 느낌은 부드러웠다.


밭에서 뽑아낸 그대로 내 손에 온 흙 묻은 쪽파 한단이 아무래도 좋다. 내게는 흙이 뭍은 쪽파 한단이 우월하다.


누군가의 수고가 없이 내 손으로 다듬는 기분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렇게 종자를 감싸던 겉껍질만 떼어내는 손질을 다 하고 나서 한꺼번에 뿌리를 잘라냈다. 뿌리를 자르면 매운 향기가 더 진동하긴 하지만 진액이 흘러나와서 먼지가 달라붙는 것이 더 싫었다. 작년보다 올해는 쪽파 손질을 더 천천히 했다. 느릿느릿할 일이 그것뿐인 양 아무런 잡생각도 하기 싫었다.



손질된 쪽파가 완성되자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말없이 글만 쓰던 남편이 점심을 언제 먹냐고 말을 걸었다. 방금 전까지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는데, 점심 차림을 뭘 할지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만히 별일 없는 날이 좋다가도 일상에선 감정이 요동친다. 그러다가 어제 끊여놓은 김치찌개가 남았다는 것을 알고 한시름 놓았다.


인스턴트 음식은 쉽게 만들어 먹지만 두고두고 먹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공들여 만든 음식은 여러 번 두고 먹으면서 제 몸값을 한다. 하루 지난 김치찌개 맛을 알고 있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김치를 버무릴 준비를 했다. 참쌀 풀을 쑤고, 고춧가루와 속 재료를 넣어 양념을 만들었다. 파김치를 통에 가지런히 넣고 시계를 보니 저녁시간이었다. 하루를 쪽파 한 단과 씨름했지만 아직까지 파김치를 사 먹을 계획은 없다.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위로가 되는 날이 꼭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싱크대 앞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누군가 대답해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손이 많이 가는 밑반찬을 만들거나 국물요리를 한다. 그래도 효과가 없는 날은 성가신 김치 담그기가 딱이다. 손질부터 완성까지 오래 걸릴수록 복잡했던 감정들은 차분해지고 감정선은 단조롭고 심플해졌다. 바깥 산책을 나서기에 날씨가 매서운 이 맘 때가 되면 김치의 효과는 더욱더 유능해지는 듯싶다.


파김치 맛을 보라고 말을 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김치를 담그고 하루를 견뎠다.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어제의 감정은 매운 파김치냄새에 온데간데 없어졌다.


하루를 묵은 파김치에선 벌써 숙성된 냄새가 진동했다. 남편은 기다란 쪽파 줄기를 하나 먹고, 간이 좀 짜다고 말하더니 내 표정을 보고 금방 말을 바꾼다.

"익으면 맛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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