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란과 찐 고구마처럼

저녁 루틴

by 무쌍

참 냉정하다.

2년마다 하는 건강검진은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는지 점수로 대답해 주기 때문이다. 가짓수가 늘어가는 검사는 매번 더 신경 쓰이게 했다. 검사 결과 항목들이 무엇인지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며 표시된 수치 예전과 비교했다


건강 검진을 하고 나면 먹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느슨해진 경계가 바짝 날이 서서 '아무거나' 먹지 말자라는 다짐을 하게 한다.


대학 시절 '아무거나' 안주는 늘 환영이었는데, 사회초년생일 땐 점심 메뉴는 '아무거나' 괜찮다는 대답이 좋은 건 줄 알았는데 말이다.


계란을 새로 사 오면 습관처럼 계란을 삶아 먹었다. 그리고 한 판을 다 먹을 때까지 요리에 쓰지 않으면 계란을 삶아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계란 한 판을 삶은 계란으로 대부분을 먹게 되었다.


고구마를 좋아하긴 하지만 제철이거나, 마트에서 눈에 띄면 사들고 왔었다. 하지만 매일 식탁 위에는 삶은 고구마가 놓여있다. 그리고 아몬드가 담긴 유리병 옆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건강보조식품들도 있다. 계란과 세트로 찐 고구마를 저녁 대신 먹는다.




한동안 기미크림을 이것저것 써보고, 새로 나온 크림 광고를 눈여겨보았다. 얼굴에 그늘처럼 생긴 기미가 점점 커져서 얼굴을 뒤덮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했다. 둘째를 낳고 생긴 기미는 조금씩 많아졌는데, 몇 년 동안 기미크림에 투자했다가 그만두었다. 이젠 기미크림 구매를 하지 않는다. 대신 화학성분이 덜 들어간 크림 하나만 바른다. 그렇게 2년이 넘었다. 가끔 화장품 광고를 보면서 구매 충동을 느끼지만 포기한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 우린 나이를 먹고 또 늙어가기 때문이다. 무리 거스르려고 해도 칠순인데 임신해서 아이를 낳을 수 없고, 나이 오십이 면 희끗한 머리카락을 거부할 수 없다. 환갑이 넘었는데, 아기 피부처럼 매끈하고 주름 하나 없다면 리얼리티 실종 사건 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먹는 음식도 심플해야 했다.

인스턴트 음식은 달콤하고 오묘하고 매콤 짭조름한 소스들은 입에서는 즐겁지만 건강검진에선 문제아로 불린다. 술과 음료수도 예외는 아니니 씁쓸하다. 그래도 받아들여야했다.


절주, 절식


삶은 계란과 찐 고구마를 저녁으로 먹은 지 6개월 남짓이다. 달라진 건 많았다.

가장 먼저 식욕이 줄어들었다. 계란도 고구마도 처음엔 양껏 먹었지만, 차츰차츰 양도 줄어서 계란 한두 개 고구마 하나가 끝이다. 몸에 밴 저녁 루틴은 다음날 아침 가뿐한 기분으로 일어나게 한다. 저녁 약속도 없다. 물론 아이들 저녁을 하게 되면 맛을 보게 되니, 종종 먹고 싶으면 한 두 입 먹기도 한다. 그래도 양껏 먹던 예전처럼은 아니다.


달랑 하나 있는 큰 유리 편수는 거의 쓰지 않았는데, 요즘은 매일 밖에 나와있다. 물을 넣어 찜기를 올리고 고구마를 찐다. 감자나 밤도 올라가지만 대부분은 고구마가 주인이다.


심플한 음식 덕분일까? 복잡한 생각도 멀어져 갔다.

있는 그대로 먹으면서 내 나이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가 보다.

일분일초가 다 의미가 있는 것처럼 계란도 고구마 맛도 섬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가끔씩 여행지에 가듯 달콤한 간식도 먹는다. 여행을 자주 가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달콤하다.

한 달 만에 여행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새로운 케이크를 만들었다면 시식을 권했다. 고구마로 만든 케이크를 먹는데 신기했다. 맛은 좋았지만 매일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저녁에 먹을 삶은 고구마가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이제야 삶은 계란과 찐 고구마처럼 있는 그대로 맛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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