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태양이 내리쬐지만 바람이 부는 곳은 어디든 견디기 힘들었다. 멀쩡한 휴대폰이 배터리 경고가 뜨더니 3%가 남았다고 했다. 방금 전 절반은 남아 있었는데 웬일인지 손에 든 휴대폰이 얼음조각 같이 느껴졌다. 온기가 없는 날씨를 휴대폰도 버티기 힘들었나 보다.
거리에 낙엽들 중 절반이 초록색 잎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병에 걸린 듯 시들어 버린 잎들인 듯 보였다. 제대로 된 단풍을 보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싶었다. 어떻게든 버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판단도 필요한 삶이라는 걸 알게 된다. 기다리기가 답을 수도 있지만 포기가 답을 수도 있었다. 나무들이 아직 남은 기회를 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할 일은 서두른 것은 아닐까. 기후변화에 몸살을 앓는 것은 자연이 맨 먼저 인 듯싶다.
자연은 냉정할 필요가 있었다.
겨울을 앞당기는 바람 때문이라도 나무는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서둘러 잎을 떨구고 달린 열매를 보존한다. 서서히 태양의 힘이 빠지면서 초록색의 열정을 빼내야 하는데, 그럴 겨를도 없는 것이다. 단단한 뿌리가 있으니 겨울을 나겠지만 근사한 단풍나무의 매력은 온데간데없었다.
노랗지도 붉지도 않은 겨자와 고추냉이를 섞은 듯 뭔가 아닌 색들이 낙엽이 되었다.
낙엽 들 중엔 흔한 붉은 잎은 보지 못했다. 서서히 물든다는 말은 사라지고 지나는 어르신들도 한 마디씩 하신다.
"점점 가을이 없어진다네요."
"그냥 겨울이 오나보네."
나무가 삶을 방법을 알려주지만 따라 하기는 쉽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는 것은 좀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가까운 관계들도 마찬 가지였다.
때가 되면 멀어지는 관계도 분명 있었다. 주변이 정리된 기분이 들었을 때, 나를 피곤하게 했던 사람들은 멀리 떠나고 없었다. 그들도 나에게서 멀어진 기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무가 겨울을 나는 법은 모두 버리는 것이다. 근본 뿌리와 줄기만 남겨두고 모두 다,
때론 잔 가지들도 모두 잘라내고 주대만 남아있기도 했다. 줄기를 짧게 잘라내도 뿌리가 버티면 나무는 다시 성장을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보다 불필요한 것을 내버려 두었다고 하면 될까? 미련 없어 보이는 나무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남겨두는 것이 익숙해지면 될 듯싶었다.
초록잎 낙엽들을 떨어 뜨린 나무들도 많았지만, 아직 떳떳하게 단풍물을 들이는 나무도 많았다.
신갈나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데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보다 더 찬란해 보였다.
황금빛 나뭇잎이 또 말을 건넨다. 버틸 수 있다면 임무를 완수해 보는 것도 좋겠다고 말이다.
유난히 이상한 일들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한 해였다. 상식이란 말이 오히려 거짓 같아 보이는, 우리는 똑바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중력이 작용하는 기울어진 땅 위에 살고 있지 않은가.
자연은 이상한 계절이라고 투정 부릴 시간이 없었다. 다음 계절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만 살 것이 아니라면 일단 오늘 할 일을 해야 한다. 차가운 마음은 사실은 열정을 보관하는 한 방법일지 모르겠다. 휴대폰이 충전되니 온기가 돈다. 다시 켜진 휴대폰을 열었더니 방금 전 찍은 낙엽사진이 보인다. 색이 얼룩진 잎들은 나의 낙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