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잃어버린 곳이 어딘지 기억도 안 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절망이 불쑥 나타나 흔들릴 때마다 엄마를 찾는 대신 나약해진 아이는자연을 찾아간다.지난여름엔 숲으로 숨었는데, 가슴이 뜨거워져 아찔해진 나는 더 차가운 온도가 필요했다.
한순간에 인생의 끝까지 와버린 듯 몸은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상처가 불러오는 '기억에서 온 감정' 때문이다. 몸에 수분이 다 빠져나가서 허공으로 떠오를 것만 같이 멍해져서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 느껴지지만 멈출 방법도 익숙해졌다.
과거를 후회한다. 아니 어린 시절의 상처를 잊지 못한다. 나만 은근히 따돌리고 가족들이 웃고 떠드는 장면을 늘 마주해야 했다. "너는 착하잖아."라는 말은 내 손에 든 것을 내어 놓으라는 말이었고, 뒤로 빠지라는 경고였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만 형제들과 다르다는 걸 인정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어느 시간이 떠올랐지만, 어서 빠져나와야 했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곧장 중랑천으로 향했다.
기억은 덮어쓰기가 가능하다. 새로운 꿈이 생기면 과거는 사라진다.
뜨거웠던 커피는 어느새 찬 바람이 다 식혀버려서 얼음을 넣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커피는 거의 다 마실 때가 되니 어젯밤 아이가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어른이 되는 것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아이는 내게 비슷한 질문을 가끔 한다.
"엄마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한다.
"아니, 엄마는 지금이 제일 좋아!"
아이는 늘 같은 대답을 하는 내가 처음엔 이해가 안 되는 듯했지만, 과거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니 그런 대답을 하는 줄 안다. 하지만 어젯밤은 대답하고 나서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서 아팠다. 나는 끝까지 숨기고 싶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나는 계속 어린아이로 살고 싶다는 아이를 부러워한다는 걸 말이다.
나쁜 사람을 만나 힘들었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불합리한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하거나... 수없이 많은 이유로 불행을 찾아온다. 갑자기 건강을 잃거나 소중한 사람의 죽음 등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다는 기분을 이겨내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상황은 무마되더라도, 기억에 남은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곱씹어 보는 감정, 똑같지만 더 강렬해진 기억들을 지울 수 없으니, 커피 한잔은 내게 링거처럼 다 마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붙들어 주었다. 나쁜 기억을 떠올리기 싫으니, 억지로라도 좋은 것으로 채워 넣는 수밖에 없다.
빈 커피잔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엉망진창이던 감정들도 함께 버리고 나니 중랑천에 부는 바람이 차갑하게 느껴졌다. 서늘해진 가슴은 따뜻한 집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아이가 먹고 싶다던 저녁 메뉴가 떠올랐다.
장을 보러 간다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완전한 희망을 품기는 어렵지만 더 다정하게 희망을 부른다. 입춘이 지나서 인가.
중랑천에 부는 바람이 살랑거리며 나를 감싸 안았다.봄은 천천히 오고 있나 보다. 내가 꿈꾸던 따뜻한 가족이 내 곁에 있다는 것, 희망은 더 다정해진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