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쌍 Feb 15. 2024

시작을 망설이는 너에게

봄까치꽃(bird's eye)

줄곧 다렸다.

오래 곱씹으면 더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몰랐다. 들키고 싶지 않아 기는 일이 익숙해서 언제부터 그랬는지 억나지 않다. 매번  '용기를 배우지 못했구나' 하고 조용히 웃음로 숨어 버렸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잖아! 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때해도 늦지 않은데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감추고 싶은 감정을 꽃이 피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펼쳐 보이면 될 듯도 했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유령을 쫓아내지 못했다.  조용히 그 유령을 따라다녔다. 말을 걸면 도망갈 것 같아중얼거리는 소리를 받아 적으면서 말이다. 그러아이를 발견했다. 이는 신의 키와 비슷한 야생화 뒤에 서 있었다. 은 앨범 속의 진을 찾아보고, 살았다는 집과 마을을 찾아다녔다. 점점 그 호기심은 빛처럼 뻗어나가 온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이는 꽃이 되어 어디서든 나를 기다렸다. 제나 나를  사이에서 맴돌게 하며 다치치 않게 해 주었다.


 꽃을 다그치지 않는 태양처럼 포근한 온도에 이끌려서 꽃을 찾아 나섰다. 늘하게 나를 감싸고 있는 공허함이 그 아이의 희망 없는 고독과 닿아 있는 듯 동질감이 느껴졌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사연을 듣고 싶었다.



봄까치꽃

 도시를 감싸던 냉정한 침묵은 2월이 되니 경계가 느슨해졌다. 밖으로 나서지 말라고 나를 감싸며 경고하던 차가운 바람도 옅어졌다. 마음이 들떠 야생화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도시의 봄은 나무늘보처럼 아오고 있다. 깊은 야생의 정원에 피는 꽃은 너무 멀리 있고 도시의 버려진 야생에서 봄을 찾아야 했다.


  얼마 전부터 중랑천푸릇한 기운 보이기 시작했는데. 온기가 가득한 공터엔 제법 푸릇한 풀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겨울을 보낸 봄까치꽃이 꽃처럼 초록빛 이파리를 세우고 있었다. 아직 꽃봉오리는 보이지 않지만 봄이 가까이 왔음을 분명했다.


 을 찾지 못해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또 다른 기대를 품다. 작년 봄에 보았던 집 근처 넓은 화단이 떠올랐다. 지는 해가 걸쳐진 건물 벽 아래 펼쳐진 화단 모서리를  샅샅이 살폈다.

아차! 또 한 발 늦었다.  까치꽃, 이미 떨어진 꽃잎이 뒹굴고 있었다.

로의 책에서 이른 꽃을 찾는 즐거움을 보았지만 아무래 나는 소질이 없나 보다. 연이 보내는 신호를 읽어내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고 해도, 나의 야생화 지도는 꼭 정리하고 싶었다.

그 지도의 시작점은  파란 점, 봄까치꽃이어야만 했다.  


  이 꽃을 참 좋아한다. 파란색 귀여운 봄 까꽃은 새의 눈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겨울이 완전히 가기 전 황량한 들판에 희망 메시지를 먼저 보여주는 이 꽃은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게도 기회는 찾아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최대한  빠르고 우아하게 달렸습니다. 깊은 밤엔 새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네요. (2017.03)


 

 생소한 외국어로 쓰인 정채 불명의 SNS 계정 피드엔 파란색이 도배되어 있었다. 그중에 내가 찍은 이 사진이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 업로드한 중랑천의 봄까치꽃 사진이었다.

 화난 마음을 가다듬고, 플리즈(please!) 붙여서 정중하게 사진을 지워달라고 했다. 하루를 기다렸다. 반응 없었다. 다시 똑같은 댓글을 남겼다. 그렇게 수일 동안 글을 남겼지만, 대꾸는 없고  사진에 좋아요 하트만 더 늘어가고 있었다.


내 속은 부글거렸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도용신고를 했지만 사실 무용지물인 신고절차였다. 더 답답한 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 사진을 허락 없이 쓴 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내 탓인 것 같았다. 일 꽃을 찍어 올리는 일에 빠져 지낸 나를 원망했다.

'내가 왜 사진을 올렸을까.' '그만둘까.' 머릿속에 맴돌았다.


 눈치를 챘을지 모르지만 난 겁을 먹었다. 이런 상황에도 혹시나 그자가 날 괴롭힐까 걱정했다. 숨고 싶 마음이 나를 뒤덮는 동안 중랑천의 봄까치꽃도 만발해지고 있었다. 피어난 꽃들을 보고 있으니 작은 용기가 생겼다.


"당신, 당장 내 사진 내리지 않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이 나쁜 인간아!라고 댓글을 남겼다.

정말 딱 하고 싶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쪽지가 왔다.

"나 구글 번역기로 번역해서 읽었어. 그래 내렸다. 내렸어 XX" 그리고 욕이 한 줄 더 쓰여 있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적반하장' 일 것이다. 그 사진을 또 도용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봄까치꽃 사진이 내려진 걸 확인했다.


 그동안 얼마 눈치를 보고 살았던 걸까. 누군가 내게 무례하게 군다고 느껴지고, 지나친 걱정이 유령처럼 나타날 때마다 봄까치꽃 사건을 떠올렸다. 그러나 겨울이 길어지 열정은 잊어버리고 망설이는 시간에 빠져 지냈다. 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글을 쓰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냥 쓴다.

 쓰고 싶은 마음으로는 문장을 쓸 수 없다. 때론 쓰고 싶다는 기분에 빠져서 근거 없는 자신감 속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가까운 에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조심스레 고백할 수도 있었지만, 글쓰기는 리가 아니라 손가락이 하는 일이었다.

 

2024.02.14


  문장은 꽃을 발견한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엔 나 자신에게 늘어놓. 스로 질책하는 일에 지친 줄도 모르고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찾아다닌 것이다. 도시의 야생화처럼 포기하지 않으면, 봄이란 계절이라면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젠 꽃이 없어서 지루하다는 불평을 더 하지 않아도 된다. 매일 꽃을 찾는 일에 매달리고 있을 테니. 겨울 내내 꽃을 대신해서 책을 쌓아두고 지냈다. 달리 숨을 곳도 없었고, 독서는 어느 상황에서도 좋은 핑계였다.

 

 새의 눈동자를 닮은 아기 손톱만 한 야생화를 보고 나니 책만 보던 눈이 좋아진 것 같다. 이 꽃을 잘 보려면 몸을 작게 웅크리고 앉아야 한다. 점 하나가 꽃이고 아무리 만발해져도 푸른 꽃이 한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 쓰기도 그러했다. 깜빡깜빡 모니터에 움직이는 글자 하나가 피어난다. 하얀 백지에 무늬가 생기고 빛을 내며 화면을 꽉 채워간다.


 도시의 까치꽃은 여기저기 피지만, 은 짧고 길어야 하루 이틀뿐이다.  파란 점 하나가 꽃이라니 가까이 보면 선명하게 있지만, 멀어지면 파란 꽃잎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존재하지만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무지개 같았다.

 그렇다. 꽃을 발견하는 건 몇 안 되는 시선이지만 꽃은 불평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는 말에 꽃은 허락해주지 않지만, 나는 고집을 부다. 시작을 망설이는 나를 생화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다. 내일이면 또 나를 잊어버리고 꽃을 찾아다닐 것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