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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Mar 07. 2024

좋아하는 걸 감추지 못하는 너에게

제비꽃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자주 초라해졌다. 왜 항상 나는 이렇게 허덕이는지 도시의 삶은 늘 어딘가 부족함이 느껴지게 했다. 애당초 나는 가질 수 없거나, 볼 수 없는 저너머 다른 곳에 있어, 만족 오지 않은 미래있을 거라  미루며, 행복함 조차 거리를 두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고 있는 회색 도시에도 작은 모퉁이마다 숨겨진 자연이 곁에 있다는 것이 든든해서, 나무가 촘촘히 심어진 동네로 집을 옮겼다. 흙 한 줌을 덮은 나무들은 비록 앙상하고 허름했지만 한 여름이면 초록빛으로 풍만해진 몸집으로 바뀌었고, 먼지가  뒹구는 석엔 작고 흔한 야생화들이 채워주었다. 자연이 주는 만족스러운 기분을 유지하려고 야생화 지도를 그렸는데,


가장 많은 표지판을 가진 꽃 중에
하나가 바로 제비꽃이었다.


 비꽃이 필 무렵, 서둘러 사진을 찍으려고 집안일은 남겨둔 채 밖으로 나다. 하루 종일 언제든 좋지만 오전에 나간 날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찬바람이 서두르지 않은 아침에 서서히 봄의 작은 흔적이 나타난다. 작고 귀여운 보라색 점.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 배터리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쑥 밀어 넣었다. 간혹 충전되지 않은 채 나갔다 낭패를 보는 일이 있어 습관이 되었다. 장을 보지 않아도 되는 날은 더 멀리 나가 모험을 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꽃을 따라 걸었다.

 

제비꽃이 피 동네를 강아지처럼 걷다가 멈추고 또 걷다가 멈추며, 이미 알고 있던 장소와 처음 발견을 한 곳까지 훑어본다. 그러다 새로운 장소에 제비꽃을 보는 순간 얼마나 좋은지... 좋은걸 감출 수가 없다.


뜨거운 태양이 등을 쓰다듬어 주고, 쏟아지는 빛을 흠뻑 먹은 보라색 꽃잎 온갖 걱정을 잊게 해 준다. 부정적인 말만 하며 나를 피곤하게 하고, 친절하지 않던 겨울이 뒤돌아 간 자리에 솟아난 희망 같았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배부르지 않은 걱정을 먹고 산다는 착각 속에 지냈다. 착각을 벗어나는 일이 간절했다.


 도시의 숲에 숨어 있던 제비꽃씨앗은 희망의 짓을 하며 마법에 풀린 듯 피어난다. 이 광경을 하나 둘 점을 찍어 지도를 그리다 보면 한꺼번에 보라색 선으로 연결되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정도였다.  장벽을 벗어나지 못하게 보라색 손은 나를 꼭 붙들었다.

제비꽃을 발견하고 몇 걸음 못 가서 또 사진을 찍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고 싶었는데, 집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꽃을 보다 보면,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 포기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다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느껴질 때, 제비꽃은 완전히 나를 지지한다.



 그래서일까. 납작 엎드 제비꽃만 보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상영시간이 끝나 컴컴한 극장에서 밖으로 나온 듯 잠시 혼란스럽다. 방금 전 특별한 장소에 있다가 일상으로 와버린 나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사진을 넘겨보며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어떤 독성에도 물들지 않으려고 제비꽃 사진을 가장 잘 보이는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바꾸어놓고 여러 계절을 지내기도 .




또 봄이 왔는데 , 월요병에 걸린 직장인처럼 흐릿한 기분으로  집안일을 다. 아직 제비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폭우가 쏟아져서 발이 묶이거나, 미세먼지가 꽉 채운 공기 때문에 집 안에 갇힌 거라면 좀 위로가 되려나. 미가 급한 나를 다독이는  이번에도 책이었다.


 꽃이 좋아서 관련된 책을 두리번거리던 내게 <제비꽃 편지>가 왔다. 사실을 편지는 아니고  제목이다. 제비꽃을 무척 아끼는 나지만 편지를 쓴 그녀에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제비꽃을 사랑는지, 결혼식 하루 전날 부케를 만들기 위해 기차를 타고 꽃밭을 찾아 얼굴이 그을리도록 제비꽃을 따왔다고 한다. 신부화장도 안 한 얼굴은 빨갛게 익어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행복했다'는 말에 나는 어림없겠다 싶었다.  그 조그마한 제비꽃으로 부케를 만들었다니 꽃을 얼마큼 모아야 부케만큼 해질?


 고대 사람들도 제비꽃다발을 귀한 사람에게 선물했다는 일화 오래된 그림과 글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제비꽃이 꽃다발처럼 만들만한 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토끼풀 꽃의 줄기는 길어서 꽃다발을 만들기억 있지만, 제비꽃은 손마디 만한 줄기가 앙증맞게 조그맣다. 그래서 작은 꽃을 모으는 정성이 꽃다발처럼 소중한 건지도 모르겠다. 추억이 담긴 하나뿐인 결혼식 신부의 부케가 될 만큼 말이다.


제비꽃 부케를 들고 결혼식을 한 작가는 50종이 넘는 제비꽃 이름을 몰랐다가 알아가고 있다는 겸손함을 털어놓았다. 꽃을 좋아하는 분들은 어쩜 이리도 꽃 같은 귀한 마음을 가졌는지 나도 배우고 싶었다. 직접 본 적 없는 야생에 피는 노란 제비꽃을 찾아가기도 하고, 각기 다른 제비꽃 이름을 외워 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천에 피는 꽃을 어찌 다 보고 다닐 수 있겠는가. 집 근처에 피는 보라 제비꽃 혹은 가끔 보이는 흰 제비꽃 다 보지 못하는데 말이다.


초봄이면 나는 제비꽃을 다 찍을 작정으로 온 동네를 다 뒤지고 다닌다. 여러해살이 야생초라 같은 자리에서 다시 피기 때문이다. 꽃은 한번 피면 며칠씩 피어 있는데, 새로 피는 꽃들이 합치면 탐스런 꽃다발이 된다. 유독 학교 주변엔 여러 가지 색의 제비꽃 군락지가 많다. 아이를 얼른 학교에 들여보내고 꽃밭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다. 그러니 늘 같은 구역을 오가는 엄마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엄마라는 자리를 지키는 나를 제비꽃은 늘 호응해 주니 말이다.    


'아직 사방이 찬바람 소리로 가득할 때 햇빛이 잠시라도 머무는 양지쪽이면 어느 풀잎보다 먼저 잎을 내고 꽃 피우는 그 모습은 봄마다 나를 눈물겹게 한다. 그리고 게을러지는 나의 생활에 가차 없이 가한다.'

그녀의 제비꽃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는데, 제비꽃을 십 년 넘게 짝사랑하다 보니 무슨 뜻인지 이젠 알 다.



 

 꽃이야기를 꽃다발처럼 엮은 책을 보며 나도 열심히 꽃을 보러 다니야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야생화 일기>처럼 근면하고 꼼꼼한 기록은 따라 하기엔 지혜도 끈기도 모자랐지만, 차곡차곡 꽃사진을 찍다 보면  새싹을 하나를 키우듯 이야기도 하나씩 꽃이 되겠다 싶었다.


 나의 제비꽃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싶었지만 어렵지 않다. 야생의 구석이 있는 곳엔 어김없이 보라색 망토를 입은 그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운이 좋은 날은 흰색 제비꽃도 만나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보라색 꽃잎이 가장 훌륭하다.

봄을 엿보고 있는 나를 겨울은 뒤돌아 보는 듯 찬바람을 퍼붓지만 나는 제비꽃이 끌어당기는 소박함에 완전히 빠져서 사진을 담는다.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꺼내 볼 손 때 묻은 책처럼 제비꽃 사진은 소중해진다.


 제비꽃만큼 약속을 잘 지키는 친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는다. 번에도 컴컴하고 지루한 겨울을 잘 넘겼으니, 나는 키필코 밭을 만날 것이다. 설령 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푸념을 해도 꽃은 모른 척해줄 테니... 든든하.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걸


낡고 허물어져가는 콘크리트 틈에 귀여운 제비꽃이 야무지게  사진을 갖고 있다. 래된 사진을 볼 때마다 수 없이 했던 걱정과 불안 대신에 강한 소망들이 머릿속에 피어다.


 나는 찍는다. 글을 쓰기 위한 나만의 루틴이다. 야생화들은 어디서든 필 준비를 하고 있으니 나는 발견만 하면 되는 고마운 일이다. 한송이가 피어있던, 꽃밭이 되었건 나에게는 정원이다. 정원에 제비꽃이 피기 시작하면 두 손은 사진을 찍고 머릿속으로 나만의 문장을 골라낸다.


 빈 노트에 촘촘히 글을 쓰인 날이나, 카메라가에 찍힌 꽃들이 메모리카드에 가득 담긴 날은 스스로 많은 일을 한 듯 안심했다. 자판을 두드리며 깜빡거리는 커서 뒤로 글자가 발자국처럼 새겨지면 한결 나아졌다. 쉬지 않고 걸을수록 머릿속에서 글자들이 알아서 나오는 게 느껴지는 걸 좋아한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모으고, 꽃잎 대신 꽃사진을 수집했다. 사연들도 오래도록 묵혀놨으니 이제 세상으로 나갈 채비가 된 걸까? 땅을 뚫고 나온 제비꽃처럼 나도  사람이 되었다. 울한 그늘에서 나와 제비꽃이 있는 밝은 곳에서 지낸다. 그리고 야무진 야생화가 일러준 대로 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나 믿게 되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작은 균열이 만든 기적 같은 제비꽃도 시들면 사라졌다. 그럼 나는 또 다른 소망을 찾아다녔다. 지난날, 새로 피는 제비꽃을 매일 걸으며 여러 가지 기대를 품었다. 땅 위로 솟아난 제비꽃처럼 어둠을 뚫고 나가기만 하면 내게도 새로운 역할이 생길 것 같았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하기까지 망설이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 듯했다. 다 결심을 한다.


제비꽃을 보자마자 사진을 찍고 싶겠지만,
꾹 참고 소설책 한 페이지를 넘겨보듯 꽃잎 하나하나를 바라볼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숨기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제비꽃 좋아하는 나를 감출 수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진다고 하던데, 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꽃을 발견할 때마다 글을 쓰 싶은 기분이 느껴졌다. 꼬박꼬박 꽃을 보러 가면 더 긴 문장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제비꽃 사진을 찍을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아하는 걸 감추지 못하는 내 성격이 이럴 때 쓸모가 있어 참 다행이다. 른 일에 바빠 때를 놓기도 하지만  제비꽃은 꼭 내 앞에 나타난다. 그때마다 좋아서 날뛰는 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내게는 너무도 유익하고 유일한 친구를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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