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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Mar 14. 2024

상처를 곱씹어 보는 너에게

산수유

 봄이 왔나요? 대답은 발아래 핀 야생화가 먼저 해주었다. 

보도블록에 누운 냉이 꽃송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찬서리는 진작에 떠났다고 했다. 털외투를 벗어던진 목련이 말하길 낮과 밤이 같아지는 춘분날 을 모두 내보낼 거라고 한다. 얼마 전에 발견한 진달래는 아직 입을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는데, 그나마 파란 봄까치꽃이 작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가 오가는 거리는 여전히 황무지인 것만 같다.

 내리쬐는 태양도 아직은 만족스럽지 않아서 어스름한 기운은 우울하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며 바람은 차갑게 질척거리기만 했다.

 

 작년 이 맘 때였다.

봄을 서두르고 싶을 때마다 내가 부르는 꽃나무가 있으니 노란 꽃 산수유였다. 꽃이 없는 겨울을 보내주었으니 선물을 받고 싶은 마음은 따뜻하고 귀여운 노란색꽃으로 받고 싶었다. 

흙이 바짝 마른 바닥엔 야생화들이 겨우 초록잎을 내밀지만, 산수유만큼은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이 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겨울 눈이 충분하게 아껴주었는지 노란 산수유꽃은 뒷심이 참 좋아 보였다. 뭔가 풀리지 않는 기분을 받아 주는 듯 불평 없이 내놓은 꽃송이를 잊지 못했다. 


 급한 성미를 달래주는 건 매화보다도 노란 꽃 산수유였다.  3월, 봄이 찾아왔으니 산수유를 만날 차례였다. 이상하게도 노란 꽃을 기대하고 찾아간 산수유는 작년에 달린 빨간색 산수유를 그대로 대롱대롱 달고 있었다.

노란 꽃이 덥수룩한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꽃보다 열매가 훨씬 더 많았다. 주름 잡힌 얼굴이 세월을 그대로 담은 듯 바짝 열매는 지난날의 영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찌 된 건지 나무는 열매를 하나도 떨어 뜨리고 싶지 않은 건지 열매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어떤 과거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나 부모와 얽힌 사연은 더욱더 그러했다. 지난날을 후회하고 불쾌했던 기분을 곱씹고 싶지 않았지만, 툭하면 떠올라 상처들을 곁에서 떠나보낼 생각이 없었다. 마땅히 독립할 나이가 지났는데도 내면 어딘가에 숨은 아이는 울먹거렸다. 그 무렵 나는 말로만 '그만두겠다' 하고, 그만두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는 몰랐을 때보다 각성했을 때 더 힘을 발휘했다. 가만히   있으면 아프지 않지만 상처 난 곳을 건드리면 눈물이 났다.


한동안 끊었던 커피를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원두커피 한 잔을 마시고도 또 마시고 싶어졌다. 다시 마시기 시작한 커피는 예전보다 자주 찾고 매달리게 했다. 쓴 맛은 이미 충분히 맛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더 강한 쓴 맛을 견뎌 보고 싶은 걸까. 수시로 나는 상처를 곱씹게 되었다.     


 과거는 이미 버려졌는데도 기억을 되살려 내며 계속 머물 있게 한 것은 나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탄생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지만,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줄줄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서 재현되면 망갔다. 곱씹기는 분석력을 활용하는 기분도 들게 했지만 핑계를 대고 미련을 붙잡는 것이었다.


지난해에 만든 열매는 어차피 떨어져야 한다. 나무는 자연의 순리대로 새 꽃을 피우고 새로운 결실을 만들어야 한다.  삶을 지속하기 위한 비움이라는 걸 산수유꽃은 내게 보여주었다.

 나도 비워내야 했다. 그렇다면 나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해 산수유꽃을 찍으면서 다짐을 했다. 처를 곱씹어 보는 일을 멈춰보자고 말이다. 결심은 내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작에 나는 상처를 기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꺼번에 나를 바꿀 수는 없었다.
시간에 기대어 볼 수밖에


가능한 멀리 도망가서 돌아오는 법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면서 지냈다. 글을 더 많이 쓰면, 책을 더 많이 보면 나아지기도 했다. 그러다 봄이 뒤로 밀려나고 남쪽에서 열기가 힘을 밀어 올렸다.

 영영 기억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여름과 가을 사이 나를 찾아온 소란은 뜨거운 공기 속에 섞여서 짜증 나게 했다. 개 떼들처럼 몰려다니던 소문들과 나를 향한 시선은 서리가 내릴 때쯤에 끝이 났다. 겨울이 입을 다무는 바람에 그 간의 일들은 비밀로 부쳐지는 듯 침묵했만, 자주 두려운 마음이 이겨서 두려웠다.


 봄은 왔으니, 곧 여름 열기가 다시 들끓어 오르면 어쩌지... 늙고 딱딱해진 과거는 이제 그만 떨쳐버렸으면, 과거를 다 짊어진 너를 어쩌면 좋지. 열매와 꽃을 다 가진 산수유를 보며 나를 보듯 애원했다. 혹시라도 가족이라서, 혈육이라서 못하겠니? 그러고 보면 그 관계는 '끊지 못해'라는 말이 답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가족은 끊어질 관계가 아니었다.

끊지 못하는 관계니까, 끝을 낼 수 없는 사이라서 지금 내가 멀떨어져 있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내가 어찌 하든 끊어지지 않으니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되지 않을 까.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D-day를 정해서 '지금부터 시작이야.'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 냥 이대로 멈추면 되지 않을까? 멀어진 가족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예전에 상처들이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도 상처가 있겠지, 우리는 언젠가 끝나는 지점이 같다는 어느 스님의 법문을 믿어볼까...


 어찌 보면 나는 과거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운명의 제비 뽑기에 걸려든 어처구니없는 탄생에 대한 원망이었을 뿐인 걸, 지난날을 후회하는 건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한 아쉬움이지, 살아온 내 삶을 후회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지 그래서 힘들었구나, 과거가 달라졌다면 지금의 나도 달랐을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으니 글을 쓰면서 용기를 내려고 했다. 사연은 놔두고 희망을 노래하고 싶어서 문장들을 모았다. 봄이 왔으니 새로운 기회도 다시 돋아 났다.


 상처를 곱씹은 건 그 상처가 자주
덧났기 때문이었다.


같은 상처를 치료하고 또 같은 자리에 상처가 덧나서 솔음이 돋았던 것인데, 송두리째 비참한 날들이었다고 할 필요가 없었다. 머릿속 기억에만 남은 상처라면 다른 기억으로 채워가면 덮어지지 않을까?

나이가 든다는 것, 아이와 남편이 있다는 핑계는 내게 좋은 대안이었다. 백만 평 오지랖도 내 사이즈로 줄이고, 착하다, 한결같다, 같은 수식어를 뗀 이름 석자만 갖기 마음먹었다. 


도시에도 봄이 왔다. 가로수로 심어진 산수유나무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언제나 찾아오는 봄에 기대어 나도 휴식을 맛볼 시간인 듯하다. 잃어버렸던 물건을 되찾은 듯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안전히 내 품에 돌아온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잃은 것이 없었다.  


어떤 과거도 계속 버티진 못한다.

오늘이 지나면 또 상처 입은 과거는 하루 더 멀어질 것이다. 지난 열매를 달고 있던 산수유도 결국엔 열매를 다 떨구고 봄을 맞이했으니, 다 지난 일이었다. 

노랗게 핀 오늘을 붙잡아서 소중한 마음을 넣고 싶었다.  언젠가는 열매가 될 꽃이니까 말이다.

자연을 느끼며 걷다 보면 나 자신을 믿고 싶은 기분이 저절로 생겨 났다. 어쩌면 큰 상처여서 내가 지불한 대가가 상당했으니 지금의 자유로움과 긍정의 에너지가 더 크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길 위에서는 어떤 과거도 계속 버티지 못했다. 



 

'흠 분명히 여기에 제비꽃이 올라올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산수유 꽃봉오리가 털질 것 같은데..."

"작년이면 벌써 꽃이 피었을 산수유인데..."


 수사관이라도 된 듯 혼자 중얼거리 화단을 빙빙 돌고 있었다. 봄이 오면 산수유꽃이 개나리 보다 빨리 핀다. 그 노란 팝콘 같은 꽃을 보고 싶어 동네 산수유나무를 거의 훑고 지나왔지만, 제대로 핀 꽃은 보지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파란 하늘이 그대로 눈부신 태양을 내리 쏟아지게 비추고 있었다. 눈앞에 핀 산수유를 만났다. 집 앞 공원의 산수유를 보며 '아차' 싶었다.


가까이 있는 꽃을 보지 못하고 늘 먼 곳에서 찾느라 사서 고생하는 이 성격을 어쩐담.

마침내 올해 첫 산수유꽃 사진을 찍었다.

귀여운 아이처럼 반짝거리는 꽃을 보며 내게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천진한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참 운이 좋은 듯싶다. 봄 꽃 들이 한눈팔지 못하게 내 곁에서 보초를 서고 있으니. 미련을 떨며 처를 곱씹어 볼 마음이 좀처럼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산수유꽃을 만났으니 야생화지도에 '집 앞 산수유'란 표지판을 하나 세워야겠다. 곧 벚꽃만개 표지판도 같은 곳에 세우면 되니 오늘의 발견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맞다!
봄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각지도 못한 곳에서 올봄에 핀 첫 제비꽃을 발견했다. 아무렇게나 자라는 꽃을 어디서 피는지 무슨 수로 예측하게는 가. 틈만 나면 찾아오는 생각들을 못 본 척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대로 핀 야생화들을 닮아가는 걸까. 어느새 달라진 나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걷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도시의 야생화 지도는 매년 갱신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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