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기대 없이 찾았던 진료실에서 듣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되니 아픈 것도 사라진 것 같았다. 의사에게 웃으면서 몇 번이고 인사를 하며 맘껏 좋아했고,나는 무척 행복했다.
어느덧 갑상선 호르몬제를 먹기 시작한 지 3년. 매일 먹은 호르몬제는 갑상선 THS를마침내 일정한 수치로 유지하게 해 주었다.
하루는 한 알 반, 다음날은 한 알을 먹었다.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일주일동안 복용한 건 씬지로이드 0.1mg이었다. 그리고 3년을 0.075mg을 유지했었다. 하루는 동일하게 복용하고, 다음 날은 0.025mg을 줄인 0.05mg을 복용하는 처방을 받았다.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되었지만 언제든 병원으로 찾아오라고 하면서 나를 응원해 주었다. 하루는 그대로 다음날은 복용량을 줄이는번갈아 먹는 일은 처음엔 어색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그렇게 6개월을무난히 보냈다.
그다음 진료엔 의사의 얼굴도 밝았다. 호르몬 용량을 또 줄였다.매일 0.05mg을 처방받았다. 3년 전 병원을 처음 찾았을 때 의사에게 받았던 0.1mg의 용량에서 딱 절반이 줄었다.
복용량을 줄여가는 것만으로 안심되었지만, 어쩌면또 3년 이 지나면건강해지는 날도 오지 않을까. 풀지 못했던 문제의 실마리를 잡은 듯선생님이 알려준 공식대로 풀어 나가면 답이 나올 것도 같았다.
진단을 받고 1년간은 모든 일상이 뒤죽박죽이었다.달라진 건 내 몸만이 아니었다. 마침 집 값이 많이 올라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나가야 했다. 뭔가 중심에서 멀어지는 기분을 한꺼번에 맛을 봐야 하는 건지, 우리 부부는 서울 중심에서 멀어진 산이 가깝고 중랑천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물이 된 것인지 남은 부속으로 겨우 돌아가는 느리고 한물간 존재가 된 듯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선 모든 것이 느리고 여유로웠다.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서 있지 않아서 인지, 토박이들이 많이 산다는 동네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나는 갈 곳 없이 어정쩡한 젊은 노인이 된 듯 희미한 일상을 하루하루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들었던 날은 이미 지난 일이 되었고,새로 이사 간 동향집은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산과 중랑천이 있는 동네는 오래 걸어도 피곤하지 않았고, 낯선 동네는 누굴 만나지 않아도 되니 편안했다.그 무렵 나는매일 낮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아졌고, 계속 우울하지도 않았다. 평온한 삶에 익숙해져 지루한 듯했지만 점점 내 몸에 대한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
갑상선 호르몬제 용량을 절반이 줄자, 무너진 일상은 절반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품었던 꿈을 되찾고 싶었다.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면 책을 실컷 쌓아두고 보석 같은 문장들을 노트에 옮기고, 손글씨로 일기장을 채우는 일이었다.
집 근처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매일 가고 싶은 날도 있었고, 게을러져 못 가는 날도 있었다.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공짜로 훔쳐보며 여러 장르의 영화를보듯 허겁지겁 기묘한 스릴을 즐겼다.드라마를 보는 것만큼이나 책 안에서 실감하고 아픈 나를 잊어버렸다. 책을 맘껏 내 마음대로 펼쳐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으니 작가들은 언제나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았다.
새로 만난 친구처럼 새로 알게 된 작가의 책을 다 찾아 읽기도 하고, 잊고 있던 친구를 만난 듯 읽은 책을 또 보며 반갑기도 했다.다정한 할머니가 정원을 가꾸는 수다가 좋아서 원예서적을 읽다가, 어린 시절 읽었던 고전전집을 차례대로 읽기도 했다.화가의 그림이 잔뜩 담긴 그림 해설집을 감상하다가 아가사크리스티 전집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보기도 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이 긴 문장이 끝도 없는 책 속에 빠졌다.
여행지가 담긴 책은 서가에 있는 대로 다 빌려보았다.멀리 나가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만한 세계여행도 없었다. 보고 싶은 친구가 생각나면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도서관 우수 대출자가 되니 경품을 받기도 했다. 대출권수가 늘어나니 한꺼번에 책을 들고 와 쌓아두고 볼 수도 있었다. 도서관 책을 올려둘 장소가 필요할 정도로 나는 도서관에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방황하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었기에 나는 책에서 여행을 하며 보냈다.
월급이 입금되던 통장 잔고는 0원이었지만, 나는 가장 호사스러운 사치를 누리듯 책을 탐닉했다. 신간도서가 들어오는 날은 서점에 서서 책을 고르듯 더 정성을 다했다. 바깥 생활을 못한 채 견디는 동안 해소하지 못한 허영심은 갖지 못하는 것에 열망이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성공한 사람들의 에세이도 새로 등단한 작가들의 신선한 작품도 가릴 것 없이 그냥 읽었다.
책을 읽다 보니 글을 쓰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을 쓸지 몰랐다. 어렴풋이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이렇게 갑상선 염증으로 내가 겪는 일들을 쓰게 될 줄은 그땐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줄이 그어진 스프링노트를 샀다. 다 채우고 나면 새로산 스프링 노트를 펼쳤다. 가장 매수가 많고, 저렴한 노트를 골랐다. 볼펜도 다 쓰면 새로 심을 넣었다. 수험생이 된 듯 책이 교과서였고 필사를 하면서 글을 쓰는 연습을 했다. 손목에 힘이 생기고 노트는 책꽂이를 채워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간지럼증처럼 몸이 꿈틀대며 이상하게 부자연스럽고 안절부절 흥분되었다. 주술처럼 무언가 내 몸을 자꾸 흔들었는데, '말을 할까 말까' 내뱉지 못한 일들은 머릿속에서 소리를 냈다. 단어 하나를 꺼내 조용히 따라 쓰면 줄지어 연결되었다. 말보다 글로 쓰인 문장들 사이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생각들이 보이면 희열을 느꼈다. 글이라고 하기엔 낙서 같았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나만 아는 글쓰기였다.
책을 읽는 것처럼, 혼자 하는 글쓰기가 좋았다.
가만히 있으면 가슴속에서만 들끓었던 감정이지만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밖으로 표현할 방법이었다.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독 속에 은둔한 채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된 것처럼 따라 하고 싶었다.
타인에게는 아픈 몸을 숨기고 남편에게는 글을 쓰는 나를 감추었다. 나만의 비밀 업무는 은밀하게 온전히 나의 만족이었다. 그러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신만의 방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 갑상선이 내게 준 선물이란 기분도 들었다. 병이 나만의 방을 만들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은밀한 방에서 하나씩 발견을 해갔다.뭔지 모르지만 나를 은밀하게 괴롭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더욱 글을 쓰게 했다. 부정했지만 병이 아닌 다른 괴로움으로부터 버티던 것이 툭튀어나왔고, 그것이 바로 목에 난 혹으로 드러나 버린 거라고 말이다. 과장일지 몰라도 나는 나도 모르는 것을 분명 감추고 있었다.
몸이 좋아지면 언제든 직장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차츰 직장이 아닌 나의 꿈이 무엇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회사로 돌아가는 대신에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기처럼 시작했지만 쓰는 일은 이력서 작성보다 훨씬 더 비범하고 진실되게 느껴졌다. 갑상선이 망가진 이유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 찾아야 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매달 입금 되는 월급을 포기하다니... 정말 미친 짓이었는데, 저지르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나? 라푼젤처럼 회사에 갇힌 나를 구원한 것이 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후에야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몰라서 계속 망설이고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면서 살았던 건지, 내 몸이 마음대로 안 되는 병에 걸리고서야 '마음대로 하지 못한 마음이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갑상선 염증이 나를 공격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스스로 숨기고 있는 감정이었다. 억눌린 감정은 다른 욕구로 발산되었다. 마음이 원하는 주파수를 찾아서 열중하고 싶었다. 갑상선이 내게 준 경고는 바로 현실을 직시하고 병이 주는 교훈을 배우는 것이었다.
진단을 받은 지 3년 만에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정말 시간은 약이었나 보다. 목에 난 혹, 쏟아지는 잠, 휴직, 퇴사, 이사, 고독 3년이란 큰 파도를 타고 넘으니 잔잔한 바다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무슨 일을 해도 3년이면 맷집이 생길만한 기간이지 않은가. 회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승진을 할 기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갑상선에게 나를 인정받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