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언제 쓸 수 있을까
나무가 써놓은 낙엽들
나는 주말에 일을 한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나선 가족들은 외출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 각자 시간을 갖는다. 주중엔 가족들을 위한 일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틈틈이 독서를 하거나 메모하는 정도만 가능하다. 모든 일을 끝을 내고 막상 글을 쓰려면 에너지가 다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집안일에 대한 강박증 때문에 몸도 무리가 갔다. 그래서 주말만큼은 식사 준비만 할 뿐 집안일은 그냥 미뤄둔다. 찬장에 그릇을 다 꺼내 쓰고 나면 설거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만, 글을 어느 정도 쓸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주말 동안은 글 쓰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면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설레는 가슴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주말엔 무얼 쓸까 고민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낙옆들은 나무가 쓴 노트 같다. 꾀 오랫동안 노트들을 채워왔다. 노트에 쓰인 글들은 나의 것들도 있고, 일기처럼 기분을 잔뜩 써놓은 글도 있다. 읽던 책에서 발견한 주옥같은 문장을 필사하며 노트를 마주하는 시간은 모든 것이 멈춘다. 집안 이곳저곳 아이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는 아이들을 피해서 노트를 펴는 순간 투명망토를 입은 기분이 든다.
노트를 펴고 쓰다만 글을 찾는다. 사진을 찍으려고 모아 온 낙엽들을 보니 나무가 써놓은 노트 같다. 봄부터 가을까지 어떤 사연들을 모아두었을까? 청 단풍잎도 초록에서 노란색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 간다. 그리고 모든 이파리들은 갈색으로 바뀌고 부스러지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말라서 갈색으로 되기 전에 나무가 쓴 노트를 훔쳐본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둔다. 이 순간을 저장하는 방법이다. 나는 소설에 들어갈 조각들을 모으듯 노트들을 채워간다. 글을 쓰는 방법은 쓰는 것 외에 없다는 걸 잘 안다. 시간도 공간도 주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가을 단풍잎이 잠깐 꽃이 되듯이 소설을 쓸 수 있는 기회도 금방 사라질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면 시간이 많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소설은 어린아이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글들은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래된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먼 날의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출간이나 공모전에 예약된 것이 아니다. 내가 맨 먼저 독자가 될 소설이고 나의 이야기다.
내 마음대로 써도 되고,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처음 쓰려는 글은 온대 간데 없어졌고, 자꾸 다른 이야기가 툭 나온다. 예상을 벗어나고 있는 건 내 삶도 그렇다. 무슨 소설을 쓰려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인다.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뭐라고 할지 두렵기 때문이다. 소설을 쓴 것이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니 핑계를 정해놓았는데 막상 수다처럼 쓰게 될까 봐 걱정이다.
늘 예상한 것보다 더 큰 일들을 겪고 있다. 결혼할 때 두배, 아이를 낳고 또 두배 , 둘째를 낳고 또 두배, 처음 나에게서 곱해진 인생은 알 수 없는 변수들을 포함해서 감당할 수 있는 영역과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는 영역까지 두어야 겨우 버텨지는 것이 되었다.
쓸 이야기는 노트에서 더 많이 늘어나 버렸다. 사실 노트를 어느 정도 채우면 정리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처음 계산이 잘 못된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너무 많아 오히려 정리를 못하고, 결론 내지 못한 잡동사니 노트가 되었다. 난 시작은 잘 하지만 마무리는 역시 소심해진다. 성격 탓이지만 또 주어진 것들을 공평하게 포장하고 싶은 욕심이 부른 것이다.
점점 장황해지는 스케일을 무슨 수로 쓴단 말인가?
다시 수다쟁이가 되어 가고 있다. 분명 수다쟁이가 아닌 쓰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수다쟁이가 되어간다. 소설 쓰기는 멈춰져 있고, 수다가 늘어간다. 해외토픽, 국내 뉴스, 동네에서 마주친 일화, 빨래가 잘 안 마른다는 진짜 별거 아닌 것들이다.
2020.12.3
어느 작가가 글을 쓰고 있거나 중요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 꼭 아내가 방해를 한다는 거다. 이웃에서 들은 이야기나 해외토픽 같은걸 와서 큰일 인 냥 혼자 떠들고는 훅 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나도 비슷한 수다를 가족들에게 하는 가보다.
전화를 걸 때 늘 남편은 바쁠 때 전화를 내가 건다고 한다. 중요한 일을 처리하거나 아이디어가 막 떠오를 때 내가 꼭 말을 건다는 것이다. 엄마도 내가 전화를 받기 곤란할 때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종종 눈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가끔은 수다를 위해 전화를 들어 본다. 그런데 내 수다를 받아 주기는 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는 나에게 폭탄 수다를 쏟아낸다. 술을 마시자고 하면 사는 사람이 발언권이 우선인데, 전화도 먼저 건 사람이 발언권을 갖는 것이 맞는데 말이다. 수다의 부작용은 멈추지 않는다. 쏟아내지 못하고 내 시간만 허비한 기분이 또 들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낮잠이나 자둘껄 그랬어.' 하며 후회를 한다.
내 소설에 수다를 떠는 여자 인물을 하나 꼭 만들어야겠다. 주인공이 글을 쓰고 있고, 한참 중요한 대화를 구상하고 있다. 갑자기 현관에서 쾅쾅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자마자 얼굴 정도 아는 이웃의 소식을 전하고, 궁금해하지도 않은 음식 레시피를 알려주는 나랑 똑같은 여자를 말이다.
오늘 소설 쓰기는 인물 하나를 구상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나는 소설 쓰는 중이야' 하고 말을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