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혼자금’ 쟁여두신 분?

머니머니해도 Money라는 현실

by 겨자풀 식탁


사람들은 결혼자금은 곧잘 준비하지만, 이혼자금을 미리 준비하진 않습니다. 왜일까요? 자금을 준비한다는 건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혹은 예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획에 없던 이혼을 결심하는 순간이 늦어지거나 영영 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거겠죠.


저는 배우자가 유해한 학대자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마음의 평정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학대'라니 너무 과한 표현 아닌가요? 참고). 하지만 곧이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하자 더 큰 좌절과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탄 열차의 종착지가 바뀌지 않는다면 열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당장 그럴 수 있는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해한 배우자의 '경제적 학대'는 교묘하고 집요합니다(이미지출처: Depositphotos)

현실을 바라볼수록 "머니머니 해도 Money"라는 말은 학대관계에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지표와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당장 따로 나가서 살 집을 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잠들고 아침이면 일어나 밥을 챙겨 먹일 수 있는 집이 필요했습니다.

가족들은 배우자의 학대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에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배우자의 경제적 학대로 인해 필요할 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쌈짓돈조차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린데 돌봐줄 사람이 없어 직업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결국 가장 강력한 족쇄였습니다. 투명한 사슬에 발목이 묶인 기분이랄까요. 어디에도 쇠창살은 보이지 않는데, 유해한 배우자와 함께 사는 한 지붕 밖으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결혼 후 어언 20년 동안 나는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았나 하는 자괴감 마저 들었습니다. 경제 활동이 전무했던 것은 아닙니다. 배우자는 아이들 핑계로 재정을 통제하며 외벌이를 주장했지만,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재택근무로 부수입을 창출했습니다. 그럼에도 결혼 생활 내내 다양한 예측불허 상황에 놓이다 보니, 따로 모아둔 저만의 재정은 잠시 통장에 머물다 금세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참고: 유해한 학대자들은 경제관념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제력이 빵빵한 아내가 배우자의 학대에서 벗어나는 예를 접할 때면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신속한 해방을 위해 합의금이나 살림살이를 위한 조정 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채 '먹고 떨어져라!' 하고 나왔다는 어떤 아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장 뛰어나가 복권이라도 사고 싶었습니다.




전문가들은 학대 경험자들이 유해한 배우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돈'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경제적 이유로 '불쾌하고 거북한 동거'를 지속해야 하는 현실은, 가볍게 여길 사안도 비난해야 할 이유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특히, 유해한 배우자와의 사이에 자녀가 있는 경우, 아이들의 기본적인 의식주와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유해한 배우자로 인해 아이들에게 안락하고 행복한 '가정(Home)'을 제공할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 해도, 일상에서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집(House)'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집 없이는 생존도 해방도 없습니다(이미지출처:Depositphotos)


맞벌이를 하거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면, 이런 종류의 고민은 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해한 학대자와 함께 살면서 경제력 마저 없을 때 느끼는 깊은 좌절감과 우울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매우 현실적인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눠보려 합니다. 매일 비현실적인 상상의 악순환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학대 회복 코칭 전문가 비키(Vickie: @the_survivor_center)의 진솔한 고백을 보았습니다.




비키는 현재 이혼 후 홀로 딸을 키우며 학대 경험자의 회복을 돕고자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전 남편이 법원에서 명령한 양육비를 지불하지 않았을 때, 집에 있는 물건 중 팔 수 있는 것이 있는지 둘러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미국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는데 식재료를 살 돈마저 없었을 때는, 딸아이와 함께 가까운 교회 무료식사 나눔 봉사를 갔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배식 봉사를 하면서 딸과 함께 추수감사절 만찬을 즐겼다며,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비키는 유해한 배우자로 인해 경제적 악조건 속에 있는 자신의 형편을 부끄러워하지도, 유해한 배우자에게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하루하루를 책임지는 태도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고민이라면, 집안을 한 번 둘러보세요. 팔 수 있는 물건이 분명 있을 겁니다. 좌절하지 말고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하세요.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돈' 때문에 유해한 학대자와 한시적인 동거를 이어가야 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돈이 없어 비참한 현실을 반영한다 생각하는 대신, 아이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언제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갈망에서 시작해서 '돈 한 푼 없는데 어떻게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라는 절망으로 끝나는 상상의 악순환을 끊기로 했습니다. 대신, 비키가 그랬듯 저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따로 살고 싶다는 생각에 꼬리를 무는 비현실적인 대처방안에 대한 상상을 포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복권 당첨, 가족이나 친척에게 거금 빌려서 당장 자립하기, 등).

갇혀있는 것만 같은 이 시기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아이들이 좀 더 자란 후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워밍업 기간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집에 있는 크고 작은 중고물품을 팔아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쌈짓돈 지갑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유해한 배우자를 통해 들어오는 수입은 배우자의 당연한 의무라 생각함으로써 불필요한 채무감을 버렸습니다. (이혼을 한 부부도 양육비 지불은 의무이니까요).

대신, 매일 아이들을 돌보고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이는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배우자가 유해한 학대자인데 나는 무일푼이라니, 이제 내 인생은 완전 폭망이야!"라는 파괴적인 내면의 목소리를 먼저 지웠습니다. 유해한 배우자가 재정적∙경제적 학대를 통해 저의 독립성이나 자율성을 제한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현실에 계속 갇혀 있을지 아닌지는 결국 저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유해한 배우자가 앗아간 나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다시 되찾는 일 마저 포기하는 순간, '이생망' 열차가 종착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가 나를 포기하게 됩니다.


돈이 없어도 사실은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깊은 물 속에서 어떤 장비도 없이 잠수해야 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저 또한 막막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내는 저 자신이 점점 강해진다는 걸 느껴요. 완벽하진 않아도, ‘이생망’ 열차에서 하차하는 방법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시도들을 놓치지 마세요. 결국은 그 작은 선택들이 우리를 살게 하니까요.


#누구도 학대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겨자풀식탁이야기

#유해한 관계면역력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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