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외상 유대감(trauma bonding)' 벗어나기
2년 전 어느 날 아침, 맨발로 계단에서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습니다. 그대로 벽을 향해 미끄러지며 발을 세게 부딪혔습니다.
"우당탕탕 쾅!"
‘아... 큰일 났다!'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묵직한 욱신거림을 참으며 계단에 앉았습니다. 부러져 들려 올라간 발톱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발톱이 빠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붙어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병원에 가니 빼내야 할 정도는 아니라며, 매일 소독하고 잘 관리하라 했습니다. 반창고를 칭칭 감고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걸음을 떼어보았습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한쪽에만 힘을 주어 걷다 보니 양쪽 허벅지가 모두 뻣뻣해졌습니다. 발목, 종아리, 무릎, 허벅지, 허리... 나중에는 어깨와 뒷목까지 몽땅 다 아팠습니다. 1센티도 안 되는 상처 하나 때문에 온몸이 신음했습니다.
그 당시 다친 발톱은 저에게 그냥 발톱이 아니었습니다. 제 상황과 마음을 보여주는 상징 같았죠.
부러져 제 기능은 못하지만 여전히 뿌리가 붙어 있는 상한 발톱. 그 발톱으로 인해 온몸을 타고 도는 욱신거리는 통증. 1센티도 되지 않는 상처에 쏠린 내 몸의 온 신경. 다친 환부에서 흘러나오는 피. 행여나 덧나지 않도록 소독하고 수시로 반창고를 갈아야 하는 수고.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하루하루.
'다친 발톱'을 '유해한 배우자'라고 바꾸면, 제 삶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부러져 제 기능을 잃었지만, 여전히 나에게 붙어 있는 존재. 그로 인해 내 몸과 마음을 타고 도는 욱신거리는 통증. 1센티만큼의 유익도 되지 않는 그에게 쏠린 온 가족의 신경. 그의 언행에 다친 나와 내 아이들의 환부에서 흘러나오는 피. 행여나 마음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수시로 소독하고 새 반창고를 갈아주어야 하는 수고.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하루하루.
한 달 뒤, 부러진 발톱은 보랏빛으로 변하며 서서히 생명을 잃어갔습니다. 걸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담쟁이덩굴처럼 저를 감싸며 타고 오르던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뿌리가 아직 떨어지지 않아 덜렁거렸지만,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건 분명했습니다. 죽어가는 발톱을 바라보며, 마치 유해한 배우자와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습니다.
죽은 발톱이 생명력을 잃어갈수록, 발가락은 아프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유해한 배우자가 학대의 생명력을 잃어갈수록,
나와 내 아이들은 아프지 않습니다.
저는 죽은 발톱이 완전히 떨어지기까지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물며 발톱 하나도 그런데,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배우자는 어떨까요? 유해한 배우자라는 죽은 발톱이 완전히 떨어지기까지 훨씬 더 오랜 기간이 걸리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몸의 회복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듯, 학대로부터 정신적∙심리적으로 회복되는 과정도 사람마다 그 속도가 다 다릅니다. [유해한 관계 해방, 뭣이 중헌디?! 참고].
회복의 속도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있을 때는 더 오래 걸립니다. 지금 돌아보면, 죽은 발톱 같은 유해한 배우자와의 학대에 생명력을 부여한 건, 다름 아닌 저의 '정신적 외상 유대감(trauma bonding)'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유해한 학대자'에 관한 지식을 막 접하고 알아가던 단계였습니다. 책과 영상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상대방의 행동 이면에 있는 이유를 파악하고, 어떻게든 나와 아이들을 보호하기 시작하는 단계였죠.
전문가들의 책과 영상에서 배운 방법을 시도하려 애썼습니다. "자신을 변호하려 들지 말아라, 자기 생각을 설명하려 하지 말아라, 상대방의 언행에 일절 관여하지 말아라, 상대방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의미 부여하고 기분 나빠하지 말아라" 머리로는 알았지만, 여전히 그의 말 한마디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수시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변호하지 말 것, 설명하지 말 것.' 전문가들이 말한 지침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말도 안 되는 막말에 피가 거꾸로 솟아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전문가의 조언을 그대로 따르며 무사히 넘긴 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또다시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에 좌절했습니다. 짐승만도 못하게 구는 배우자에게 제대로 응수하려 대화를 시작했다가, 들개처럼 같이 물고 뜯으며 싸워 만신창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없이 성공과 실패를 반복할 뿐, 현실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대자에게 양분을 주는 '정신적 외상 유대감(trauma bonding)'이 문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문가의 방법을 아무리 되뇌어도 소용이 없었던 건, 뿌리에 양분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 하나, 눈빛 하나, 행동 하나에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하며 묶여있는 내 생각과 감정이 그 양분이었던 겁니다. 그 공급을 먼저 끊어야 했습니다. '학대자의 행동'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자, 어지럽도록 빙빙 돌던 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듯했습니다. 막무가내로 쏟아내는 비난의 말들에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소리를 지르는데, 내 마음속 차분한 무언가가 입술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유해한 배우자와 저 사이에는 어느새 두껍고 튼튼한 보호벽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내 자존감, 내 삶의 가치, 나에게 소중한 관계, 내가 좋아하는 취미, 내가 누리고 싶은 소소한 일상의 기쁨, 나의 취향. 유해한 배우자라는 죽은 발톱을 붙잡고 있던 '정신적 외상 유대감(trauma bonding)' 뿌리를 잘라내자, 그 아래 꽁꽁 묻혀있던 '나'라는 새 발톱이 돋아나기 시작한 겁니다.
시간이 꽤 흘러 부러진 발톱 주변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을 무렵, 습관처럼 소독을 하고 반창고를 붙이며 생각했습니다. "너는 곧 떨어져 나갈 발톱이지만,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나는 너를 성실히 돌볼거야. 때가 되면 너는 자연히 떨어지겠지. 그러면 나는 더 가볍고 편하게 걷게 될 거야."
아무것도 아물지 않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그 지난한 구간을 지날 때. 죽은 발톱이 아직 덜렁거릴 때. 그때도 날마다 소독하고 새 반창고를 붙여주어야 합니다. 죽은 발톱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회복을 향해 자라고 있는 '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발톱을 억지로 잡아떼는 대신, 새로 올라오고 있는 발톱을 응원해 주어야 합니다.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내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내 아이들의 상처가 너무 깊지 않도록. 날마다 소독을 하고, 매일 반창고를 갈아주어야 합니다.
마침내 돋아난 새 발톱과 함께 일어나 다시 걷도록. 더 단단하게, 더 자유롭게 나아가도록.
#누구도 학대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겨자풀식탁이야기
#유해한관계면역력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