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날? 축제의 날!
"00야, 여자가 된 걸 축하해!"
사춘기 소녀들은 초경을 시작하면 축하를 받는다. 꽃다발을 선물 받기도 하고, 가족들이 모여 작은 케이크에 초를 꽂아 불기도 한다. '어린이'에서 '숙녀'로 넘어가는 순간을 기념하는 통과의례 의식이다.
나 또한 매우 쑥스러운 축하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본인이 어릴 적 받아보지 못한 축하를 나에게 애써 건네는 모습이 역력했다. 난생처음 겪는 신체의 변화에 이미 어리둥절했다. 축하는 기쁘고 좋은 일에 하는 것인데, 나는 초경을 축하받으면서도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축하를 건네는 엄마의 마음이 고마워 나도 쑥스럽게 히죽 웃었을 뿐.
쉰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초경 때 다하지 못한 자축을 완경 때 제대로 하리라 다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를 정성껏 내리고, 얼그레이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함께 먹으며 그 순간을 만끽할 것이다. 일생동안 성실하게 임무를 완수한 자궁을 위해 초를 불 것이다. 정확한 '완경' 날짜를 알기 어렵다는 게 문제 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일생을 '완주해 낸' 나의 자궁과 모든 호르몬들에게 축하를 건네고 싶다.
'초경'과 '완경'은, '삶'과 '죽음'처럼 동전의 양면으로 얽힌 관계다. '마침내' 여자로 '태어난' 초경의 끝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으로서의 '죽음'을 뜻하는 완경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여성의 월경혈에 독성이 있다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이 든 월경혈을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없는 완경은 곧 질병의 원인이라 여겼고, 심지어 거머리를 사용해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하니, 완경이 곧 죽음이라는 인식은 인류에게 친숙한 시선이다.
다행히도 인류는 생식 기능에 초점을 두고 여성의 몸을 바라보던 시대에서, 여성의 몸 그 자체를 가치 있게 바라보는 시대로 발전해 왔다. 그럼에도 '폐경' 혹은 '완경'이라는 단어 앞에서 '갱년기 우울증'이라는 마음의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쩌면 이 우울감은, 우리 삶이 여성성의 '탄생'과 '끝'이라는 틀 안에 갇히기에는 너무 다채롭다는 외침은 아닐까? 완경을 여성성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완경의 날이 도래하는 날까지 축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을 품게 해 준 책이 있다. 바로, 제니퍼 건터의 <완경 선언>이다. 밑줄 그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 고르기 힘들지만, 그중에 가장 와닿았던 문장들을 소개하고 싶다.
"심장처럼 뛰지 않는다고 해서 간이 약하다거나 병에 걸린 것이 아닌 것처럼, 난소에서 에스트로겐 호르몬이 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이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완경에 대한 담론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은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따라서 무력감과 두려움에 빠지기 쉬우며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주장하기도 힘들다"
"완경에 대한 담론"이 부재한 공백에는 "무력감과 두려움"이 고인다. 새로운 도랑을 터주지 않으면 물은 흐르던 길로 흐르듯, 우리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지금부터라도 완경에 대해 왁자지껄 떠들며 새로운 물꼬를 트고 싶다.
"마지막 월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많은 여성이 월경이 끝나기 수년 전부터 완경기와 관련된 증상과 건강 상태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또한 여성 생애의 3분의 1 혹은 심지어 절반에 달하는 시기를 자궁과 난소의 기능에만 결부해서 설명하는 것은 여성혐오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남성의 노화를 설명할 때 성기능 감퇴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남성들이 '완발기(erectopause)'를 겪고 있다고 말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납득이 갈 것이다."
저자는 여성의 질환을 정의하는 '의학용어'를 남성에게 동일하게 적용해 보라고 말한다. 남성에게 사용했을 때 어색함이나 억지스러움이 없는 용어들만 여성에게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남성들의 '완발기(erectopause)'를 앞다투어 다루는 매체들을 상상해 보라. 듣도 보도 못한 용어 앞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왜 '완경기(menopause)'라는 말 앞에서는 우울함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완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문화권에 사는 여성들이 완경이행기동안 고통을 덜 받을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일부 나와 있다. 이는 단어를 바꾼다고 해서 여성이 발열감이나 질 건조증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한 사회가 공개적으로 완경을 끔찍한 질병이 아닌 하나의 변화로 수용한다면 그에 따른 후속적인 영향들이 있을 것이다."
'완경기' 혹은 '갱년기'를 '끔찍한 시기'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는 심적 고통도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완경'이라는 단어가 없는 문화권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단어의 부재가 고통의 경감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더없이 경이로웠다.
레라 보로디츠키(Lera Boroditsky) 박사는 테드 TED 강연에서 언어는 우리 일상을 단순히 서술하지 않으며, 적극적 '참여자' 역할을 한다고 역설했다. 예를 들어, '다리(bridge)'라는 동일한 단어라 해도, 이 단어를 문법적 여성형으로 사용하는 독일과 문법적 남성형으로 사용하는 스페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독일에서는 다리를 '아름다운' 것으로, 스페인에서는 '강한' 것으로 묘사한다.
언어가 우리 삶과 해석의 경로를 적극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면, 나는 '완경'이라는 단어 앞에 온갖 축제의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우리의 경험을 결정한다면, ‘완경’을 어떤 단어로 채울지도 우리의 선택일 테니까.
찬란한 완경, 충만한 완경, 완경의 환희, 완경의 지혜, 노래하는 완경, 춤추는 완경. 물론, 나의 요란한 수식어들이 신체 노화 증상까지 불꽃놀이로 바꿔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완경'이라는 삶의 전환점이 무거운 추가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게 놔두는 대신, 나만의 언어로 그 추를 흔들며 춤추고 싶다.
초경을 기다리고 축하하는 소녀처럼, 완경을 기다리며 축제를 벌이는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
사춘기 소녀에게 어색하고 뻘쭘한 축하를 건네던 엄마의 미소처럼, 나의 완경 축제도 우스꽝스럽고 어정쩡한 춤사위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더웠다 추웠다 하는 나의 몸뚱이가 완경기의 널뛰는 호르몬과 더불어 춤출 수 있다면, 마음의 우울도 어느새 다채로운 들썩임에 미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겨자풀식탁이야기
#유쾌한 나이 듦 언니들에게 물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