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상상력은 존엄의 중량을 측정할 수 없다
영화 <부르스 올마이티>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노숙인'의 모습이다. 신은 찢어진 종이 상자에 문구를 써서 들고 있는 노숙인의 몸을 빌려 예언을 한다. 이는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신의 사랑'을 상징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치는 존재들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노숙인을 보며 '신'을 떠올린다면 어떤 이유일까? 아마도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스쳐가는 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나중에 그 호의가 자신에게도 돌아오기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리 큰 호의를 베푼다 해도, '노숙인'의 존재는 거기 있으나 거기 없다. 신과 나 사이에 오가는 '호의의 거래'가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종이 상자를 든 '노숙인'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는 우리나라에도 존재한다. 미국에 종이 상자를 들고 서 있는 노숙인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폐지를 줍는 노인이 있다. '교통안전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고, ‘십 수년간 폐지를 모아 기부한 천사’로 조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간다.
2010년 국민연금 광고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 있다. 폐지 나르는 손수레와 여행 가방을 나란히 놓고, "65세 때, 어느 손잡이를 잡으시렵니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아래는 "품위 있는 제2의 인생 국민연금으로 시작하십시오"라는 문구가 있다. 해당 작품에 대한 비판이 일자, 국민연금 관계자는 "대학생들이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만든 작품이라 오해를 부른 것 같다"는 해명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 광고는 단순한 빈곤 조장이 아니라, 우리가 노년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보여준다. 폐지를 줍는 노인의 삶을 ‘두려운 미래’로만 인식하는 이 광고 속 질문은 정말 "거침없는 상상력"일까?
한번 상상해 보자. 폐지를 하나라도 더 줍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일한다. 리어카를 하나 가득 채운 폐지는 20-30kg에 해당하는 무게다. 적게는 50kg, 많게는 100kg에 달하는 폐지를 리어카나 손수레, 카트 등에 담아 옮긴다. 차량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안전사고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
환경미화원의 경우, 야광조끼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착용하지만, 폐지를 줍는 노인분들은 그마저도 없다. 무거운 폐지를 나르느라 근골격계 손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질병을 달고 사는 경우도 많다. 내 노년의 모습이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도 이상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폐지 줍는 노인'이라는 표현은 이제 '노년의 빈곤'을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보편적 상징은 곧 '공포의 상징'이 되었다.
김영옥의 책 <노년은 아름다워>에서 작가는 어느 날 신호대기 중 마주했던 잊지 못할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몇 안 되는 행인을 무심코 바라보던 나는 끌리듯 어떤 한 사람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폐휴지를 잔뜩 쌓아 올린 손수레를 힘겹게 끌고 있는 '노파'였다. 손수레에 쌓인 상자가 몹시 무거워 보였다.
횡단보도 앞에 도달한 그녀는 천천히 손수레를 멈췄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분명한 그녀의 중성적 얼굴에서 놀랄 만큼 강한 존재감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음울하게 빛났고, 그을린 갈색 피부는 고단한 삶 너머의 황야를 연상시켰다.
마치 잉마르 베리만의 흑백영화 속 주인공을 보는 듯했다. 원망을 닮았지만 원망은 아닌 그저 절망일 뿐인 눈빛, 뼈대가 굵은 검은 갈색 얼굴 그리고 그녀가 힘겹게 끌고 있는 폐휴지 가득 쌓인 손수레. 이 모든 실존의 한가운데서 그녀는 강렬하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얼굴은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폐지 줍는 노인을 이렇게 심미적으로 묘사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 날 그 길목에서 그 노파를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도 똑같은 장면을 보았을까? 확신하건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노년을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침없는 상상력'으로는 포착해 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폐지 줍는 노년의 삶이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소중하다고, 그러니 우리 모두 폐지 줍는 노후를 상상하며 아무리 극한의 빈곤이라 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른 아침 눈을 떠 어김없이 옷을 챙겨 입고, 아직 어스름한 새벽 집을 나서는 그분들의 마음을 떠올려 본 적이 과연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고 싶을 뿐이다.
내일 아침 폐지 줍는 노파의 몸으로 눈을 뜬다면, 나는 결연하게 폐휴지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 젊음이 지닌 힘과 젊음에 담긴 세월로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낸 결과가 '노후 빈곤'이라면, 나는 그 현실 속에서도 변함없이 내 몸을 일으켜 손수레를 끌 수 있을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을 한탄하는 대신, 폐휴지를 하나라도 더 모으기 위해 허리를 펴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을 수 있을까. 종일 걸으며 100kg에 육박하는 폐지를 끌고 다닐 수 있을까.
나는, 못할 것 같다.
그 모습이 비참하거나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그만큼의 결연함이 없기 때문이다. 내 하루의 존엄을 지키는 근골격의 힘이, 아직은 물렁하기 때문이다. 제도를 탓하고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말이 훨씬 더 깨어있는 지식인의 모습이라 믿는 '거침없는 상상력'이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젊음이 지닌 상상력은 세상을 바꾸기도 하지만, 도리어 현실을 외면하기도 한다.
김영옥은 자신이 매료되었던 그 노파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단순히 순박한, 단순히 불쌍한 할머니도 아니었고, 단순히 불행한 폐휴지 줍는 노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타협하지 않고 절망하는 '늙은 여성'이었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결연한 절망이었다. 손쉬운 용서나 포기, 체념이나 초월 따위는 절대 허용할 것 같지 않은 그 결연한 절망 앞에서 나는 질문과 항의를 보았고, 더 나아가 품위와 존엄을 보았다."
'폐지 줍는 노년'이라는 표현 안에 담긴 이미지는 '불쌍한' 혹은 '순박한' 그리고 '나약한' 노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모지상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든 '거침없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작가 김영옥은 그 상상력의 렌즈를 벗고, 노파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했다.
'타협하지 않고 절망하는 품위 있는 존엄'을.
작가가 목도한 그 노파의 '존엄'은 폐지의 중량에 있지 않았다. 노파의 탱탱한 피부나 건강한 신체에 있지도 않았다. 노파가 살아낸 세월, 그 세월에 담긴 무수한 이야기, 그리고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존재로 담아낸 '결연한 절망'의 몸짓과 눈빛 안에 있었다. 젊음의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노년의 존엄은 그렇게 나타난다.
"노년이 시선을 끌 때, 그 끌어당기는 힘은 주름이나 잡티 없는 얼굴, 처지지 않은 눈이나 입, 혹은 날씬한 다리나 탱탱한 엉덩이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자글자글한 주름이, 갈색으로 변한 피부가, 처진 눈이나 입이, 근육이 빠져 납작해진 엉덩이나 정맥류로 울퉁불퉁한 다리가 모두 시간의 주름을 가리키기 때문에 노년은 시선을 잡아끈다. 되새김질 속에서 그 주름진 시간이 부화시킬 이야기나 질문 때문에 그들은 존재감을 발산한다."
신에게 더 큰 호의를 얻기 위해 노숙인에게 작은 호의를 베푸는 순간, 그 노숙인은 거기 있으나 거기 없다. 신적 존재를 향한 우리의 거침없는 상상력이 우리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후 대비'를 위해 폐지 줍는 손수레를 경종 삼는 젊음의 거침없는 상상력은, 노년이 지닌 삶의 존엄, 절망의 존엄, 거친 피부와 자글자글한 주름의 존엄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노후 준비’라는 제도적 호의를 위해 '폐지 줍는 손수레'라는 공포의 상징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과연 그 손수레의 무게를 실감해 본 적 있는가? 폐지의 중량으로 측정할 수 없는 존엄의 무게를 가늠해 본 적 있는가?
폐지의 무게가 100kg이라면, 노년의 존엄을 바라보는 내 상상력의 무게는 몇 kg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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