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맺는 속도, 돈을 보는 시각. 오랜 시간에 걸쳐 달라진 사람들
베트남에서 15년 이상을 살고 나서야 깨달은 게 있다.
호치민 사람에게 하노이 사람 얘기를 꺼내면, 혹은 하노이 사람에게 호치민 사람 얘기를 꺼내면
둘 다 같은 표정을 짓는다.
같은 나라 사람을 말하는 얼굴이 아니다.
이민자가 이 사실을 늦게 아는 이유는 지도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도는 하나지만, 사람의 코드는 둘이다.
호치민에서 처음 만난 자리는 빠르게 달아오른다. 밥 한 번에 이름을 트고,
두 번째 만남에서 사업 얘기가 나온다.
경계가 낮고 속도가 빠르다.
관계가 곧 기회이고, 기회는 지금 잡아야 한다는 감각이 도시 전체에 깔려 있다.
하노이는 다르다.
첫 만남은 격식이 있고 탐색이 길다.
세 번째쯤 만나야 상대가 조금씩 속내를 꺼낸다.
관계는 천천히 쌓이고, 한번 쌓이면 쉽게 끊기지 않는다.
호치민에서 통했던 빠른 친밀감이 하노이에서는 가벼움으로 읽힌다.
한국인 이민자가 가장 먼저 벽에 부딪히는 지점이 여기다.
호치민에서 익힌 속도를 하노이에 그대로 가져간다.
호치민에서 관계의 언어는 숫자다.
얼마를 버는지, 어떤 사업을 하는지가 대화의 중심에 빠르게 올라온다.
성과가 곧 신뢰다.
잘 되고 있으면 문이 열리고, 안 되고 있으면 연락이 뜸해진다.
하노이에서는 순서가 다르다.
어떤 집안인지, 어디서 공부했는지, 누구를 아는지가 먼저다.
격식을 건너뛴 제안은 내용과 무관하게 가볍게 읽힌다.
호치민에서는 숫자로 설득하고, 하노이에서는 관계와 배경으로 설득해야 한다.
같은 사업 제안이 한쪽에서는 기회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실례가 된다.
호치민에서 3년을 잘 버틴 사람이 하노이로 넘어가서 첫 해를 통째로 날린 경우를 봤다.
나의 경우도 같다. 호치민에서 2년 동안 2개의 지점을 내서 번 돈을 몽땅 부어 하노이점을 만들고 1년도 채 못버텼다
사업 모델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팅 자리에서 첫 만남에 계약 얘기를 꺼냈고, 상대는 그날 이후 연락을 끊었다.
호치민이었다면 그게 추진력이었을 텐데, 하노이에서는 무례였다.
베트남어를 한 가지 배웠다고 베트남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언어는 하나지만, 그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다.
호치민에서 관계를 여는 말이 하노이에서는 관계를 닫는 말이 되기도 한다.
베트남 이민은 한 나라로의 이동이 아니다.
두 개의 문화권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를 선택했다고 다른 하나를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가장 비싼 수업료를 낸다.
지도는 하나여도, 사람을 읽는 법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