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국부, 호치민

왜 호치민 없이는 베트남을 설명할 수 없는가?

by 무타리

호치민을 모르고 베트남을 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그는 역사책 속 인물이 아니다.

지폐에 얼굴이 새겨져 있고, 최대 도시의 이름이 그의 이름이며, 공공기관마다 초상화가 걸려 있다.

죽은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베트남에서 호치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많은 사람이 그를 '반미 혁명가', '공산주의 지도자'로만 기억한다.

베트남 전쟁의 프레임 속에서 그를 보면, 호치민은 냉전의 한쪽 편에 선 정치 지도자로 평면화된다.

그 시선으로는 오늘의 베트남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세운 것은 정권이 아니라 국가의 기준이었다

호치민이 남긴 것은 정권이 아니라 정체성의 틀이다.

1945년 9월 2일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할 때, 그는 미국 독립선언문의 첫 문장을 인용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가가 미국의 언어로 베트남의 독립을 정당화한 것이다.

이념보다 전략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권력의 외양을 거부했다.

대통령 관저 대신 정원사 숙소 같은 목조 가옥에 살았고, 인민복을 입고 맨발로 농촌을 다녔다.

이 행동이 '인민의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는 통일 이후에도 국가 통합의 언어로 작동했다.

베트남 정부가 지금도 그를 '호 아저씨(Bác Hồ)'로 부르는 것은 이 상징 체계의 연장이다.


경제 개방이 그의 사상과 충돌하지 않은 이유

1986년 도이머이(Đổi Mới) 개혁은 베트남 경제의 전환점이다.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외국 자본을 받아들이면서 베트남은 고도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이 개방은 호치민 사상과 충돌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이념보다 실용에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베트남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해 농민 중심의 혁명론을 구성했다.

이 유연한 사상적 구조가 도이머이 이후 시장경제를 수용하면서도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베트남식 노선을 가능하게 했다.

경제 정책을 바꾸면서도 체제 정당성을 유지하는 논리적 기반이 호치민에게 있다.


일상의 행동 기준으로 내려온 그의 언어

베트남 학교 교육에서 호치민의 사상은 필수 과목이다. 어릴 때부터 그의 어록을 배우고, 그의 생애를 외운다. 단순한 우상화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교육이 만들어낸 것은 숭배가 아니라 행동 기준이다.

"근면, 검소, 청렴, 정직"이라는 호치민의 생활 원칙은 베트남 사회가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베트남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할 때 관계를 먼저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계약보다 신뢰가 앞서는 문화다. 지도자의 언어가 사회의 언어가 되고, 그 언어가 행동 방식을 만든다.

문화는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호치민을 안다는 것은 좌표를 갖는 일이다

베트남은 지금 빠르게 변하고 있다.

외국 기업이 들어오고, 젊은 세대는 글로벌 문화를 소비하며, 도시는 재개발로 모습을 바꾼다.

그 변화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국가 정체성의 기준, 체제의 정당성 논리, 공동체 중심의 사회적 신뢰 구조.

이것들은 모두 호치민이라는 인물을 통해 만들어졌고, 지금도 유지된다.

그를 아는 것은 베트남의 과거를 공부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 베트남이 왜 이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좌표를 갖는 일이다.

베트남에서 비즈니스를 하든, 여행을 하든, 그 나라 사람과 대화를 나누든

호치민이라는 좌표 없이는 표면만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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