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류이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 부제에 있는 음악과 같이 감상하시면 더 재밌습니다.
https://youtu.be/PafgcXXsAvw?si=rTxbTWVaxqOef0fH
그 남자의 역사는 다짐의 발자취였다...
그 남자는 한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귀가 어깨에 닿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굽은 몸을 양팔로 지탱한 채로... 시선은 발끝을 향한 듯했지만 초점은 없었다. 탄력 있고 매끈하던 다리는 하지정맥류를 앓으며 여기저기 울퉁불퉁해지고 앙상하게 변해 침대 끝에 걸려있었다. 언제부턴가 그 남자는 다리보다 팔로 지탱하는 시간이 많아졌었다. 책상 앞에서 발이 닿지 않은 채 허공에 떠서 뜬 구름만 잡으려 했던 시간들. 생각하면 쓴웃음도 나오지 않는 그 시간들 때문에 다리는 퇴화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눈은 흐리멍덩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꺼내야 하는데 꺼내고 싶지 않은 내면의 폭발을 겨우 저지하고 있는 듯 보였었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폐지되지만 대학 입학시험 전기, 후기에서 모두 낙방한 청년에게는 사회통행금지 같은 처분이 내려진다. 영장이 나왔다. 교복 및 두발자율화 발표가 무색하게 청년의 머리는 이전보다 더 짧아진다. 청년은 차라리 잘됐다는 심정이다. 몸을 혹사시켜야 그나마 생각이 멈출 것 같다. 마음이 어둠에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억눌린 이 감정을 폭발시켜야 한다. 진흙밭을 뒹굴고 짐승같이 포효하면 뭔지 모를 것들로 꽉 막힌 가슴이 뚫릴 것 같다. 부모는 입영을 연기하고 재수를 권하고 싶지만 청년이 방황으로 재기하지 못할까 봐 그게 더 걱정이다. 청년은 가족, 친구들의 배웅을 거절하고 입영열차를 탄다. 마치 포로수용소에 끌려가는 듯한 청년의 눈빛은 공허하지만 앙 다문 입술은 '돌아올 때는 잊으리라, 전부 잊으리라, 그리고 기필코 살아남으리라.'라는 다짐을 삼키는 듯하다.
그 남자는 탈출하기 쉽지 않은 포로 신세가 된 것 같았다. 새롭게 도입되는 제도는 마치 음서제 같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학비부터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하늘이 정한 운명에 귀 기울이지 않는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처음에는 비록 실패하더라도 사지육신 멀쩡한데 나가서 할 것 없겠냐는 호기로운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일하고 싶어도 '할 것 없는 세상'이 진짜 와버렸다. 그나마 이 동네 물가가 싸서 산꼭대기 공부방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생활은 이어갈 수 있었다. 완전 폐지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아껴가며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미 1차에는 여러 번 통과한 적도 있다. '그래! 포기하는 순간이 마지막이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자.' 그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기필코...'라는 다짐을 반복했다. 꼭 살아남겠다는 다짐을 매년 반복했다. 빵틀에 갇힌 붕어빵처럼 그 남자의 다짐들은 서서히 구워졌다. 그리고 곧 한 바퀴를 다 돌아 강제로 꺼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소년의 삭막한 마음속 전장(戰場)에 유일하게 한 떨기 꽃을 피워냈던 소녀의…, 그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쾌활해서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항상 먼저 친근하게 다가오던 소녀의 부재는 큰 상실감을 안겼다. 특히 소년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상실감이었다. 소녀가 타고 있는 운구차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등교시키러 왔을 때, 소년은 음악실로 향했다. 학교에 남아 그녀를 위해 몰래 연습해 왔던 피아노 연주를 들려줘야 했다. 소녀가 들을 수 있도록 음악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작별인사라도 하는 듯이 창밖으로 커튼이 흩날렸다. 소년은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연주를 할 수 없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떨리는 손...
'해야 되는데... 꼭 연주해야 되는데... 그녀가 모르는 숨겨뒀던 마음을 꼭 들려줘야 되는데...'
소년은 애써 눈물을 참아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소년은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을 멀리했다. 책상, 교실, 운동장, 교정, 음악실... 그리고 피아노. 피아노 학원을 마지막으로 나설 때 소년의 가슴에 난 구멍은 훨씬 거대해졌다. 소년의 마음은 그 구멍에 모든 것을 빼앗겨 텅 비어 가고 있었다.
그 남자의 책상 앞에는 열정과 노력을 찬양하는 뜨거운 다짐의 글귀가 항상 그 남자를 차갑게 내려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대의 막을 내리고 돌아서며 알아차렸다. 그 남자의 역사는 다짐의 발자취였다. 지금까지 그 남자를 지탱한 것은 살아남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그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래서 스스로 내려놓기로 결정했던 날. 그 남자는 다른 내면의 폭발을 경험했다. 자기 것이 아니었지만,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소년의 삭막한 마음속 전장(戰場)에 소녀가 피워냈던 한 떨기 꽃처럼 또 한 번 지탱해 줄 힘을 받았다. 그 남자는 어젯밤 결국 떠올리지 못한 소녀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탱해 줄 수 있는 힘, 소녀의 한 떨기 꽃 같은 「사카모토 류이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피아노 선율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 남자 대신 눈물 흘려주고, 화 내주고, 아파해주고, 괴로워해 주고... 대신 그리워... 해주듯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