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V자외선 살균기의 빛과 그림자

박멸은 면역력 저하만 초래할 뿐

by 철없는박영감
익숙하고 친해지면 면역력이 생겼다고 한다.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층간소음은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겨서 그러려니 넘어가는데, 악취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화장실 환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담배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고층에 살 때는 몰랐던, 저층세대로 이사 오고 나서 비올 때면 나는 하수구(정화조) 냄새와 주말마다 위층들의 세탁세제 냄새는 두통, 심할 때는 메스꺼움 현상까지 나타날 정도로 힘들다.


사실 고층에 살 때도 게으른 깔끔쟁이였던 나는 냄새에 민감해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도 어딘가에서 쉰내가 조금이라도 나면 침구를 일광소독하고, 건조대에 못 너는 애들은 건조기로 스팀살균을 했으며, 식기들을 세척기에 넣어 고온살균을 하고, 가전들이 돌아가는 사이 고무장갑을 끼고 대야에 락스물을 풀어 화장실 청소에 돌입했다.


서울에서 직장 다닐 때, 낙성대역 근처 원룸에서 자취를 했는데, 화장실에 가면 타일이 분홍색이었다. 샴푸나 바디워시에서 이염됐나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것이 곰팡이임을 알고 그때 화장실의 시금털털한 냄새의 주범을 잡았다. 괜히 애먼 변기만 락스 세례를 받았다. 그 뒤로는 화장실은 무조건 일주에 한 번씩 솔질을 해주고, 배수구도 모두 분해해서 락스를 부어 살균을 했다. 나중에는 스팀청소기까지 사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균박멸을 외치며 스팀청소도 시작했다. 샤워실 유리칸막이의 석회질 물때는 스팀청소기가 제일 깨끗이 오랫동안 청결을 유지해 준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이런 필자에게 획기적인 살균 아이템이 발견됐는데, 바로 UV 자외선 살균기였다. 스탠드 형식으로 UV램프를 달아 공간을 살균해 준다는 원리였다. 충전식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그동안 내내 신경 쓰이던 신발장, 옷장 같은 가구 내부는 물론 화장실, 옷방, 창고, 팬트리 등 밀폐된 공간도 UV살균램프로 살균할 수 있었다. 살균기 작동이 끝나고 나면 그 공간에는 일광소독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살균이 됐음을 확신했다.


편리한 도구가 생기면 게을러지는 것이 인지상정. 일주일에 한 번씩 솔질하던 화장실 청소는 주기가 길어지고 대신 매일매일 출근할 때마다 살균기를 틀어놓고 가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화장실에 안 보이던 곰팡이가 눈에 띄었다. 까만곰팡이였다. 예전에는 화장실 전체적으로 벽에 분홍색 곰팡이가 끼었다면, 지금은 일정 부위에 까만곰팡이가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살균기 때문에 문을 닫아 놔서 습기가 안 빠져서 그런가?'

주말에 다시 솔을 들고 화장실 청소를 한 뒤, 그 뒤로는 선풍기를 틀어 먼저 습기를 빼고 아침저녁으로 살균기 작동시간을 늘렸다. 하지만 며칠 뒤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번에는 스크랩퍼로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단계를 추가했다. 이마저도 소용없었다. 그동안 안 보이던 까만곰팡이는 계속 발견됐다.


'한번 생기면 뿌리 뽑을 수 없나? 망한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주말에 스팀청소기를 꺼내 스팀청소를 싹 하고, 락스로 바닥, 벽, 천장을 모두 닦아냈다. 그리고 스크랩퍼로 물기를 제거하고, 선풍기로 말리고, 살균기를 틀었다. 필자가 알고 있는 모든 청소방법을 전부 동원했다. 하지만 결과는 소용없었다. 한번 생긴 곰팡이는 박멸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그냥 포기했다. 괜히 게으름 피우다 청소만 늘었다며 벌 받았다고 자책하며 지나갔다.


몇 달 뒤, 살균기를 자주 쓰다 보니 충전지가 수명을 다했는지 아무리 충전을 해도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살균기 수명 종료와 비슷한 시기에 화장실에서 까만곰팡이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인지를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까만곰팡이 보고 청소한 적이 언제였더라?'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때 INTJ-t의 성향을 가졌던 필자는 분석에 들어갔다. 그리고 결론에 도달했다.


화장실 까만곰팡이가 발생하는 위치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이 UV자외선 살균기의 빛이 안 닿고 무언가에 가려서 그림자가 생기는 부위였다. 욕조의 한쪽 벽, 세면대와 거울 사이, 변기의 한쪽면... 화장실 중앙에서 살균기를 작동했다고 가정하면 빛이 가려진 그림자 지는 부분이었다.

'아 맞다 UV살균기의 원리가 자외선으로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거지...'

학부 강의 시간에 들었던 UV살균의 원리가 갑자기 생각났다. UV살균기는 빛이 닿는 곳에 있는 세균의 RNA복제를 막아서 증식을 막는 원리다. 그래서 인체에 무해한 수준의 세균만 남아있게 하는 원리다.


정리하면 화장실에 전체적으로 퍼진 까만곰팡이는 육안으로 확인 안 될 정도의 농도로 분홍색 곰팡이와 영역싸움을 벌이며 생존해 왔다. 물론 절대 다수인 분홍 곰팡이에게 밀려 찍소리 못하고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살균기의 등장으로 증식 가능한 영역이 줄어들며 생존을 위해 그림자 속으로 점차 모여들었고, 육안에 확인될 정도로 군집을 이뤘다. 추측하건대 이러면서 인체에 유해할 정도로 진해졌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얼리어답터 병이 도져서 구입한 신제품이 도리어 더 안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마도 저 군집에서 퍼트린 포자는 내 호흡기에 더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으악! 최악의 결과다.


세상을 밝히고, 양지로 이끌어 주는 빛은 좋은 것이다. 게임이나 영화에서는 빛은 선, 어둠은 악으로 묘사될 정도다. 어둠에는 뭔가 음침하고 사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다. 이런 어둠을 쫓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둠을 쫓다 보면 점점 더 강한 빛을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빛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따라온다. 그리고 그림자에는 까만곰팡이처럼 무해한 수준으로 퍼져있던 것들이 강한 빛을 피해 응집하면서 유해한 수준으로 힘을 모아 나타난다. 유해한 것들을 무해한 수준의 농도로 포용하는 것. 익숙하고 친해지는 게 박멸보다는 낫지 않을까? 박멸은 면역력 저하만 초래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멸은 불가능하다.


하하하 화장실 청소가 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것은 절대 아니....ㄹ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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