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가다

당연한 것처럼 누리던 특권

by 철없는박영감
어디서도 키는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이제는 평균신장이 되어버린 걸까? 나이 들면서 키가 줄어든 걸까? 예전 빌딩숲을 걸으며 받던 느낌을 이제는 사람숲을 걸으며 느낀다. 의정부에서 자란 나는 미군들이 지나갈 때면 남녀, 인종할 것 없이 큰 키에 주눅 들었는데, 이제는 한국사람들에게도 주눅 든다. 키 큰 어른들 사이에 파묻히면 순식간에 미아가 되는 키 작은 아이가 된 것 같다. '왜 이렇게 큰 사람이 많은 거야?' 이제 장신의 기준이 남자는 190㎝, 여자는 180㎝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다.


眼下無人(안하무인)


신장 183㎝. 건강검진에서 컨디션 좋으면 185㎝까지 나온다. 한참 잘 나갈 때, 세상이 만만할 때는 모든 것을 눈 밑으로 보고 다녔다. 빽빽한 만원 지하철을 타도 무더운 여름을 빼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시내버스에서도 앉을자리가 없으면 손잡이에 머리를 대고 졸면서 다녔다. 대게 사람들보다 머리하나가 위에 있었다.


정체 (停滯)


대중교통을 콩나물시루에 비유하자면 언제부턴가 나는 그대로인데 다른 콩나물들이 쑥쑥 올라왔다. 요즘은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으면 여자분들도 거의 눈높이가 맞다. 건너편에 서있는 남자분들도 별로 안 커 보였는데 옆을 지날 때면 어깨높이가 비슷하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흔하다. 남자분들은 '좀 큰가?'싶으면 여지없이 머리하나가 위에 있다. 한동안 생각도, 마음도, 사상도 그리고 피지컬마저 정체된 기분에 우울하기도 했다.


묻혀가다


안하무인들의 무시 대상이 되고 나니 그동안 뭘 누리고 살았는지 깨닫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특권. 그래서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특권. 약자층들이 사회에 대해 어떤 억울함, 반감 그리고 분노를 가질지 알 것 같다. 주변환경에 의해 땅속에 묻히는 느낌. 영화에서나 보았던 생매장되는 느낌. 이보다 무서운 감정이 어디 있을까? 여성, 어린이, 노인, 장애인... 아마 모두 그런 무서운 감정에서 휩쓸리다 보면 최후의 발악은 필연일 것 같다.


앞으로도 사람숲은 계속 높아질 것 같다. 그런데 키뿐만 아니라 생각도, 마음도 그리고 사상도 높아진 울창한 숲을 기대한다. 그 안에는 다람쥐도 토끼도 여우도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 초록색 수목이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고, 열매를 맺고 버섯도 키워 배부르게 해 주고, 추운 날에는 피할 곳도 제공해 주는 그런 큰 사람숲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럼 그 안에 묻혀가지 않고, 유유자적 묻혀서 살아가는 숲 속 작은 입주민이 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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