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외전)
새벽부터 은영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시간을 보니 3시 12분에서 13분으로 막 바뀌고 있었다. 아직 윗 집 빌런이 활동을 개시하려면 한 시간도 더 남았는데, 이래저래 은영의 단잠을 방해하는 방법들은 예측을 불허한다. 전화번호를 보니... 저장해 놓은 번호는 아니었지만 아는 번호였다. 옛날 집으로 이사 온 신혼부부의 애송이 번호다. 지난 몇 번의 시답잖은 통화 때문이라도 차단을 했어야 했는데, 전 주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참은 것이 문제였다.
이번에 또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이 새벽에 전화를 거는 것이 과연 제정신 박힌 사람이 할 짓인가 싶기도 하고, 동시에 오죽 급하면 이 새벽에 전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싶기도 했다. 짜증이 나면서도 궁금하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 되니 기분이 찝찝해졌다. 아~! 잠은 다 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전생에 무슨 원수를 진 인연인지... 이번 전화도 그냥 무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갈수록 태산
"... 어... 여보세요?"
은영은 일부로 더 허스키하게 잠긴 목소리를 냈다. '자다가 너 때문에 억지로 깼다'를 어필하고 싶었다.
"저... 안녕하세요... 여기... 103동 904호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인데요... 어흑..."
애송이의 목소리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이 새벽에 무슨 일이세요?"
은영은 성대를 더 긁으며 자다 깬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저... 현관... 비밀번호가... 어떻게... 되죠?"
"네?"
은영은 벌떡 일어났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걸 왜 이 새벽에 나한테 전화해서 묻고 있는 거야... 술이 떡이 되가지고는... 이 놈 또 무슨 수작이지...? 아니... 그 잘나신 와이프는 어쩌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은영의 머리 위로 전구가 '띵' 켜졌다. 이제는 돗자리를 깔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미소도 지어졌다.
"저... 카드키가... 어휴... 어흑... 안 돼서요... 비밀번호가 뭐였죠? 어흑..."
이 애송이의 목소리에서 술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은영이 번호를 가르쳐준다 해도 아마 비밀번호를 바꿨거나, 집안에서 강제잠금을 해놔서 안 열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은영은 비번을 불러줬다.
"0731 이요..."
"아... 감사합니다! 쿨럭! 공... 칠... 삼... 일... 어...! 안되네... 저... 이 번호 아닌가 본데요... 어흑! 혹시... 다른 번호 없나요...?"
"아... 네... 다른 번호 없고요... 될 때까지 기다려보세요... 전화 끊습니다."
은영은 재빨리 종료버튼을 누르고 번호를 차단했다.
"아휴~ 내가 살다 살다..."
은영은 이미 달아난 잠을 다시 잡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일어나 환기를 시작했다. 앗! 그런데 담배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은영은 재빨리 다시 문을 닫고 물을 한 컵 마셨다. 이 놈의 동네가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
날이 밝고 아침 산책을 다녀오니 또 전화가 왔다. 그동안 안 울리던 전화가 한꺼번에 울리며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여보세요!"
"네... 여기 관리실인데요..."
"관리실이요?"
은영은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네! 103동 904호 맞으시죠?"
"아... 저 이사 왔어요... 과장님!"
통화를 조금 하다 보니 아는 목소리였다.
"아... 이사 가셨어요?"
"아휴~ 과장님도... 이사 갈 때 인사드렸잖아요... 비타 500 사들고 갔었는데... 뭐 이런 걸 사 오냐면서 좋아하셨으면서..."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어쩐지... 어쩐지..."
"왜요? 무슨 일인데요... 과장님!"
"아니...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계속 전화가 와서... 내가 '그럴 집이 아닌데...'라고 했다가 804호 사모님한테 한참을 혼났지 뭐예요?"
"어머! 어머! 그래도 그렇지 뭐 그런 걸로 어른을 혼내고 그런데요?"
"아~ 뭐 그거야 그럴 수 있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나도 이사 간 거 까먹고 그렇게 얘기한 건데... 하여튼 이상해서 집 앞에 와봤는데, 지금 집 앞에 피가... 난리가 났어요... 계단에 유리창도 깨져있고... 피자국이 집안까지 나 있어서..."
"어머! 예? 어머! 어머!"
"아! 이게 뭔 난린가 싶네... 하여튼 알았어요... 이상해서 전화해 봤는데... 혹시 새로 이사 온 사람 전화번호는 모르죠?"
"아! 네... 저도 오늘 새벽에 비밀번호 알려달라고 전화를 했길래... 짜증 나서 바로 차단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아휴... 이거야 원! 참... 일단 알겠어요... 사무실 가서 다시 확인하고 전화해 봐야죠 뭐... 전화 잘못 걸어서 죄송합니다."
"아! 네... 그럼 고생하세요..."
은영은 전화를 끊고 걱정과 함께... 고소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심보를 곱게 써야 돼...' 그런데 피자국은 좀 심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자... '방금 한 말 취소! 취소! 퉤 퉤 퉤'라고 속으로 다급히 외쳤다.
며칠 뒤 은영은 또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아~ 궁금해! 궁금해! 어떻게 됐을까? 아~ 궁금해 미치겠네...' 어느새 은영의 손가락은 최근통화에서 옛날 집 관리실 과장님 번호를 찾고 있었다.
"여보세요? 관리실입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저 103동 904호... 얼마 전까지 살던..."
"아...! 예예예! 이사 가셨잖아요... 그런데 웬 일로...?"
"아니... 그냥... 뭐 잘 지내시는지... 전에 그... 사건은 어떻게... 잘 해결됐는지..."
"아~ 그거요? 말도 마요... 그 집 난리 났어요..."
"예?"
"그날 피바다 되고... 얼마뒤에 바로 이사 나가더라고요... 그 집 남자가 술 마시고 계단 유리를 주먹으로 깨고 바닥에 피바다 되고... 며칠 있다가 손에 붕대 감고 나타나더니... 바로 퇴거 신고하고 이사 가던데요... 아휴 말도 마요... 그동안에 804호에서 시끄럽다고 계속 전화는 오지... 올라가서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아무도 안 나오지... 내가 그 집 때문에 10년은 빨리 늙었어요..."
"어머! 어머!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고생 많으셨겠네요..."
"아휴~ 워낙 급하게 나가서 아직 비어있는 거 같더라고요... 집 그렇게 놔두면 안 되는데... 아휴 어쩌려는 건지... 원..."
은영은 전화를 끊고... 생각에 빠졌다. '아~ 괜히 찜찜하네... 고소하다는 생각도 하지 말걸...' 은영은 물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면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찜찜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하하 호호 웃으며 청사진을 그리던 네 사람이, 빈 집으로 놔두고 이사 나갈 정도면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진짜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지금 윗 집, 아랫집, 앞 집의 이웃들은 훨씬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은영에게서 싹트고 있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