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제1화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이 시간의 창밖은 마치 흑백사진 같았다. 하늘은 별빛 하나 없이 뿌옇고, 맞닿아 있는 회색 건물 사이를 아스팔트가 까맣게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무채색으로 멈춘 자동차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다. 오직 신호등의 노란 깜빡임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세영은 본격적이기 전(前)인..., 아직 깨어나기 전인... 이 시간의 창밖 풍경을 좋아했다.
여름이면 일출이 매우 빨라 금세 여명이 밝아왔다. 그러면 세영은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며 시간이라는 물감을 눈(眼)이라는 붓에 묻혀 흑백의 풍경에 칠했다. 지평선에 불그스름한 보라색을 칠하는가 싶다가 순식간에 파랗게 하늘을 칠했고, 중간에 흰 칠로 구름도 빼먹지 않았다. 아스팔트에는 물을 발라 검은색을 좀 빼고, 그 위의 자동차에는 총천연색을 칠했다. 마지막으로 건물에 음영을 넣고 간판을 칠하면 날이 밝았다.
세영은 밤에 잠들지 못했다. 아니 잠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애써 칠해놓은 색이 바래지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낮이 싫었다. 특히 모든 것이 바쁘게 활동하며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지도 모른 채, 다른 무언가의 변화만 본격적으로 도모하는 낮이 싫었다. 이런 모습이 보기 싫어서 그는 일부러 낮 시간에 자신을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이른 새벽 세영의 바스락거리는 기척을 느낀 반려견 쫑이가 쫄랑쫄랑 다가와 꼬리를 흔들었다. 그는 쫑이의 머리를 한번 만져주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TV소리와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안방의 인기척을 조용히 확인했다. 마른기침과 함께 TV채널 돌아가는 소리를 확인하고 조심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양연이 침대에 기대앉아 귤을 까먹으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영은 그녀의 혈압약부터 체크했다.
"엄마... 일어나서 혈압약은 드셨어? 일 마치고 와서 밥 해드릴게... 밥 먹어야 되니까, 귤 너무 많이 까먹지 말고, 얌전히 계셔... 밥 먹고 약도 드셔야 되니까... 저 갔다 올게요?"
"......"
침대에 기대앉아 화면을 응시하며 말없이 뭔가를 먹고 있는 한결같은 그녀의 모습은 세영을 안심시켰다. 그가 방을 나와 현관으로 향하자 쫑이가 또 쫄랑쫄랑 다가와 배웅했다. 마트 오픈을 위해 집을 나선 시간은 새벽 5시가 조금 못 된 때였다. 정각 5시에 자신이 운영하는 마트에 도착하면, 그는 밤이슬을 피해 들여놓았던 상품들을 다시 밖으로 꺼냈다. 비어있는 곳에 있던 것을 채워 넣는 일은 그에게 힐링 그 자체였다.
離婚, 別居... 離別
빈소를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조문객이라고 해봤자 세영의 직장동료 몇몇과 지인 약간이 전부였다. 은주와 세영은 같은 대학, 같은 과 출신이었지만 CC는 아니었다. 둘 다 워낙 학부시절부터 주변과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졸업 후에도 연락이 닿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결혼식 하객도 대부분 아르바이트로 모집된 사람이었다. 은주의 영정사진 앞에는 딸을 잃고 넋을 놓은 양연과 아내를 잃은 세영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고인이 되기 전, 아니 그보다 먼저 별거하기 전 은주는 이혼을 요구했었다. 귀책사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재산분할도 원치 않았다. 세영은 몇 달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그녀는 죄책감과 함께 답답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이 그나마 그에게 보답하는 길 같았다. 그리고 되도록 빨리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그의 생일날 짐을 쌌다.
은주가 기다림 끝에 재차 이혼을 요구한 다음날, 인기척이 사라진 방문을 세영이 열었을 땐 이미 서랍과 옷장이 비어 있었고, 이혼서류와 결심이 서면 연락을 달라는 쪽지만 놓여있었다. 그는 그 뒤로 잠드는 것이 어려워졌다. 쫑이를 집에 들인 것은 그녀가 떠나고 한 달 정도 지나서였다. 그는 밤마다 품으로 파고드는 쫑이를 억지로 방안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 긁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보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삼 년 뒤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