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제4화
손을 씻고 나온 세영이 양연 앞에 앉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마치 감독이 '커트' 사인을 주지 않아 애드리브로 연기를 이어가는 배우들 같았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난처함과 난생처음 하는 어색함으로 가득 찼다. 그는 그녀가 먼저 수저 들기를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우걱우걱 맛있게 먹는 척해야 할지 난처했고, 그녀는 그가 먹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건지, 밥그릇에 반찬이라도 올려줘야 하는 건지 어색했다.
한 식탁에서 한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각자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싶은 두 사람이 연출하는 식구의 모습은 숨겨진 다른 진실을 품은 듯 음식마저 겉돌았다. 미역국의 소고기는 구수한 향만 날 뿐 톱밥처럼 퍽퍽했고, 진미채 무침은 소스의 윤기로 빨간 자태를 뽐낼 뿐 딱딱하게 메말라 있었다. 세영도 그다지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양연도 빨리 다시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오직 쫑이만 낑낑대며 진실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세영은 '맛있네'를 연신 외쳤지만, 그에 비해 밥그릇에서 밥이 줄어드는 속도는 그렇지 못했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욱여넣고 열심히 씹었지만 잘 넘어가지 않았다. 국을 한번 떠먹어보지만 퍽퍽함만 입에 남아 이내 물을 들이켜야 했다. 식사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양볼만 다람쥐처럼 부풀어 올랐다. 차라리 물에 말아먹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양연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양연 역시 세영의 볼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면서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으라며 물은 떠다 줬지만, 내심 그가 빨리 먹고 일어나길 바랐다. 그리고 빨리 거실 소파로 가서 평소대로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다가 잠들기를 바랐다. 오늘은 그녀의 아들, 은호의 생일... 빨리 그가 잠들어야 그녀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오늘 안에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오늘이 지나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숨겨진 (hidden)
은주는 갑자기 세상에 혼자 뚝 떨어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가족 모두가 그녀를 떠났다. 첫 번째는 아빠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기 때 아빠는 떠났고,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갑자기 돌아왔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싫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의 결혼식에 손잡고 들어갈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서였을까? 오빠도, 엄마도 그녀와 마찬가지 생각인 것 같았다. 아니 그녀를 위해 같이 기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빠는 혼자가 아니었다. 빚더미를 안고 돌아왔다. 오빠는 본인이 다 떠안고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얼마 안 가 사고로 두 번째로 그녀 곁을 떠났다. 아빠라는 작자는 이때 빚만 남겨놓은 채 보상금을 갖고 사라졌다. 그때부터 엄마가 돌변했다. 항상 취해 있었다. 그리고 '네가 대신 희생했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난했다. 그녀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나도 같은 자식 아닌가'라는 숨겨진 원망이 그녀 안에서 점점 커졌다.
은주는 여대생도, 멋진 커리어 우먼도 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알코올의존증인 엄마를 부양하며 어렵게 학교를 다녀야 했다. 이때부터였다. 그녀의 눈빛은 점점 양연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은주 또한 양연처럼 엄마에게서 버려졌다. 하지만 은주는 결혼이라는 피난처로 도망가지 않았다. 시대가 그렇지 않았다.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악착같이 버텨냈다.
드디어 은주가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돈이 모였을 때다. 그즈음 양연도 정신을 차렸다. 비록 여러 임시직을 전전했지만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청소 대행업체 팀장의 배려로 아파트 청소관리로 안정적인 일을 시작했다. 이 가족은 각자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겉으로는 어렵사리 가족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속에서 보면 모녀지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문드러졌었다.
이때 아빠라는 작자가 다시 나타났다. 양연은 일터에 있었고, 은주 혼자 집에 있을 때였다. 그는 다짜고짜 돈을 요구했다. 하지만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질려버렸던 눈빛을 딸에게서 발견한 그는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위협했다. 그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지금의 현실이 이 작자가 돌아왔을 때 싫어하지 않았던 자기 탓 같았다. 이 작자가 없던 때로 돌아가야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는 바닥에 쓰러져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흉기가 들려있었다. 바닥은 빨간색으로 따뜻하게 물들어갔다.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손에서 흉기를 뺏어 들었다. 엄마였다. 엄마는 놀라우리만큼 차분했고, 눈빛은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은주야! 은주야! 정신 차려! 정신 차리고 똑똑히 들어. 이건 내가 한 거야. 내가 돌아와서 너랑 같이 있는 이 사람을 보고 눈이 뒤집힌 거야... 알았어? 그런 거야 알았지! 넌 잘못한 게 없어. 알아들었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