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제5화
'잘 먹었습니다'라는 세영의 말과 함께 겨우겨우 식사가 마무리 됐다. 그가 싱크대에 담그려는 듯 그릇들을 포개자 양연이 놔두라고 애써 그를 저지하며 식탁정리를 시작했다. 그는 잠깐 주춤하다가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신문을 펼쳤다. 이내 '쏴'하는 물소리와 함께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그릇소리가 집안에 경쾌하게 퍼졌다. 설거지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 나물에 그 밥인 기사들 때문인지 신문도 경쾌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세영은, 말이 신문(新聞)이지, 단지 지나간 과거를 활자에 묶어 그저 지면에 봉인해 놓은 것이 '신문'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봉인된 사건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기사를 거울삼아 반성하고 예방해도 어차피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어 있다고도 생각했다. 어찌해 볼 도리도 없고, 바꿀 수도 없으며, 이미 다 결정 나 버린, 봉인된 사건들은 디테일만 조금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타인은 지옥이다'
동시에 이런 점 때문에 세영은 신문을 봤다. 비어 있는 곳에... 있던 것을 채워 넣는 일은 그에게 힐링 그 자체였다. 그리고 채워진 곳에서 힘을 잃은 것들을 솎아내서 집으로 가져와 박제시키는 것은 그의 의무이자 책임 그 자체였다.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는 유기물, 무기물 상관없이 그에게 전부 평등했다. '누구를...' 혹은 '무엇을...' 갖다 놔도 그에게는 전부 똑같았다.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지옥일 뿐이었다.
제일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였다. 세영이 떠올리는 '엄마'는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은 고사하고 눈, 코, 입, 아예 얼굴 자체가 없었다. 그는 '엄마'의 비어 있는 얼굴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채워 넣었다. 얼마 전까지는 은주였고, 다음은 쫑이, 지금은 양연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항상 그가 채워 넣은 것들은 결국에는 힘을 잃었다. 그렇게 안 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면 그는 결국 생각한다. '또 솎아야 되나...'
봉인된 (Sealed)
세영의 기억 속에, 그와 그의 누나는 항상 '엄마'앞에 발가벗겨져 있었다. 한글을 처음 배운 날, 'ㅎ'을 예쁘게 못 쓴다는 이유로 발가벗겨졌고, 테마파크 놀이기구 고장으로 물 위에 혼자 고립되어 겁에 질렸던 날,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돈 아깝게 이용시간을 다 못 채웠다고 발가벗겨졌다. 1등 성적표를 가져온 날, 올 백이 아니라고 발가벗겨졌고, 기어이 올 백을 받아온 날, 여러 명이 올 백을 받았다는 이유로 예전에 왜 못 받았었냐며 다시 발가벗겨졌다.
세영은 누군가가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를 발가벗겨 가두고 매질한다면 그 누구라도 '엄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은 '너 때문에... 너 같은 걸 낳은 내가 정신 나간...'이라며 스스로 욕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자학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커서는 속으로 원망이라도 했지만, 어릴 때는 매 맞는 두려움이 커서 울기만 했다. 사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는 누가 엄마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세영은 그리고,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발가벗겨져 매 맞고 난 뒤에도, 잘못했다고... 엄마 없으면 못 산다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그 소름 끼치는 품에 다시 안기는 누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엄마가 술을 마시고 자기 기분에 취해 그를 꼭 껴안는 날이면 살갗이 닿은 부분을 전부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가 혐오하는 대상은 엄마에서 가족으로 그리고 타인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평등해졌다.
세영은 고아가 되고 싶었다. 날마다 가족 모두가 죽어 없어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가족을 다른 것들로 채워 넣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말년 병장이 되어 도서관에서 혼자 직감을 서면서 그는 책을 읽으며 실제로 인생에서 가족들을 지워버릴 가장 잔인한 방법을 계획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 있었다. 말년휴가 복귀 전 마지막날 밤, 그는 술을 마시고 용기 내어 집을 찾았다.
"그때 저한테 왜 그랬어요? 지금이라도 후회하나요?"
"...... 내가? 내가 그랬다고? 내가 그랬나? 글쎄 그런 기억 없는데..."
세영은 취해 있었지만, 벌레를 보는 듯한 경멸하는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그 알량한 자존심에 넌덜머리가 났다. '미안하다는 말... 그저 그 한마디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그는 그대로 나와 복귀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하지만 결행하려던 전역일을 조금 앞두고 그는 조기 퇴소해야 했다. 살인강도사건이었다. 그렇게 그의 복수는 다른 이의 손으로 실행됐고, 계획은 그대로 봉인되었다.
세영은 그 뒤로 신문을 읽었다. 얼어붙은 마음속 비어버린 원망들을 살인사건, 특히 존속살해, 패륜범죄 같은 강력범죄 사건 기사로 채웠다. '역시 나만 별종이 아니구나...' 디테일만 조금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신문 속 봉인된 기사를 읽고 있으면 행복해졌다. 봉인되어도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원망도 다른 것들처럼 채워 넣을수록 힘을 잃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곧 솎아내 박제화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올 것이다. 역시 그에게는 모든 것이 평등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