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제6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뿐사뿐 내리는 눈은 무게감이 없었다. 벌써 봄이 됐나 싶을 정도로 마치 흩날리는 꽃가루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싱크대에서 하얀 거품과 씨름하고 있는 양연이 연신 재채기를 했다. 소복이 하얗게 덮인 세상은 일시적으로나마 순수함을 되찾은 듯했다. 집안에서 보는 순수함은 목화솜이불처럼 차분하고 따뜻했다. 비처럼 요란하지 않았고, 사방을 정적에 휩싸이게 만드는 마법 같은 순간을 연출했다.
밖에서 보는 순수함은 조금 달랐다. 도화지처럼 하얗게 펼쳐진 눈밭 위에 흔적을 남기려 서두르는 이들이 있었다. 신나게 뒹굴며 러브스토리를 찍는 연인, 두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덩이를 굴리는 아이, 그리고 루돌프를 자처하며 흰 눈사이로 썰매를 끄는 엄마도 있었다. 산책 나온 강아지들은 내리는 눈을 입으로 물겠다며 하늘을 향해 연신 뛰어오르기도 했고, 그 위에 경쾌한 발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쟁터도 있었다. 제설차가 지나다니고, 가게들은 저마다 제 집 앞 눈을 치우겠다며 더 분주히 돌아다녔다. 행인들은 행여나 빙판이 된 곳에서 미끄러질까 봐 더 조심했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던 길바닥 장애물들은 하얗게... 그야말로 은폐, 엄폐되어 지뢰가 되었다. 게다가 내리고 있는 눈은 무게감이 1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용히 사뿐사뿐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엎치고 덮쳐 짓누르기도 했다.
세영은 거실에서 창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 무채색이 되어가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이 더 좋았지만, 만약 마트에서 전화가 오면 나가 봐야 했다. 양연은 설거지를 하면서 그런 그의 기척을 살폈다. 이대로 눈이 계속 내리면 아마 그는 나가야 할 것이다. 그가 빨리 잠들기를 바랐던 그녀의 기대는 더 완전한 자유를 위해 그가 나가기를 바라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덮인 (Covered)
양연은 살림에 취미가 없어 보였다. 새끼들을 건사해야 한다는 중압감 속에서 매일같이 밖에서 시달리고, 녹초가 되었다는 핑계로 하루하루를 소주병으로 덮어나갔다. 자연히 집은 점점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되었고, 은호가 그런 엄마를 대신해 살뜰히 집안과 동생을 챙겼다. 그렇게 아이의 동심은 너무 일찍 때가 타버렸고, 어른의 허울에 일찍 갇힌 아이는 철이 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만큼 일찍 철새가 되어 날아가버렸다.
양연은 1심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사건의 진실은, 그렇게 그녀의 의도대로 그녀의 인생사로 차분히 덮였다. 반면에 언론과 시민단체는 서둘러 흔적을 남기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의도치 않게 재판정과 세상은 모두 그녀의 편이었다. 단 한 사람만 빼놓고... 이것도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은주는 그 뒤로 재판정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사로 덮어 되찾은 딸의 순수함은 일시적이었다.
양연은 징역 10년 형이 확정되었다. 수감되고 난 후에 그녀는 철저히 혼자였다. 은주는 면회도 한 번 오지 않았고, 뜨거웠던 대중의 관심도 주홍글씨만 남긴 채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형기를 거의 채워갈 때 즈음, 편지가 한통 도착했다. 은주의 결혼소식과 함께 1억이 들어가 있는 양연 명의의 통장도 함께 들어있었다. 그리고 출소해도 나타나지 말아 달라는... 덮인 건 제대로 덮고 싶다는... 부탁도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