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제7화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서있는 세영의 시선은 자장가처럼 고요했다. 그는 양연이 약기운에 취해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끝내놓은 설거지를 다시 할 요량이었다. 덕지덕지 모자이크처럼 때가 낀 세상에 하얀 비누거품을 내놓은 듯한 눈은 제대로 헹궈내지 않으면 미끌거려 행인을 골탕먹이기도 했고, 커피 얼룩 같은 흙먼지를 하늘에서부터 머금고 와 여기저기 착색시켜놓기도 했다.
세영은 건조대에 마구잡이로 쌓여있는 눅진한 그릇들을 꺼내 하얀 거품이 다시 내리게 했다. 그리고 그릇 표면을 넉가래로 밀듯이 맨손으로 하나하나 밀어 헹궈냈다. 그러고 나서 건조대에 종류별로 크기별로 줄지어 세웠다. 설거지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양연이 제정신일 때 해놓은 집안일들을 그녀가 잠들었을 때,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찾아서 그렇게 전부 다시 해놓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단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였다.
양연은 도모하고 벌이는 일은 잘했지만, 뒷정리나 수습은 서툴렀다. 늘 마무리가 아쉬웠다. 세영이 처음 그녀와 같이 살게 됐을 때, 거듭되는 이런 일이 다소 피곤하고 귀찮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질수록, 조금씩 조금씩 모르는 사이에 그런 피곤함과 귀찮음이 없어지다가, 어느새 일상에서 이벤트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추억이나 그리움 따위는 아니었다.
양연은 은주가 집을 나간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무렵 자신을 그녀의 엄마라고 소개하는 얼굴로 인터폰 화면 속에 나타났다. 세영은 잠깐 당황했지만 화면 속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돌아왔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는 문을 열고 양연을 집안에 들였다. 화면이라는 필터가 사라지고 어색함이라는 새로운 필터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단 초인종을 눌러야 한다는 그녀의 무모한 의지에서 시작된 동거는 그에 의해 수습되고 있었다.
거듭된 (Again & Again)
은주는 이번에도 도망쳤다. 미완(未完)의 것은 일단 한번 드러내면 절대 완벽해질 수 없다는 그녀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은 말을 꺼리고, 대답을 회피하고, 마주침을 피하게 했다. 하지만 피하고 또 피하면서 유일하게 남은 그녀의 독기 어린 눈빛은 그녀가 마치 심사숙고해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고, 더 이상 도망칠 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뱉은 말은 그녀를 강단 있어 보이게 했다. 세상은 그렇게 그녀에게 가면을 씌웠다.
은주는 가면 뒤로 점점 더 꽁꽁 숨고 피하고 도망쳤다. 그리고 거듭될수록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는 경지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뭘 숨겼는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 지도 모호해졌다. 영원히 편이 되어 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던 언론과 시민단체 그리고 여론은 그녀의 가족에게 '남편 잡아먹은...'이라는 주홍글씨만 뜨겁게 새겨놓고 금세 차갑게 식어버렸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곳에 기사와 악플만 남았다.
은주는 관심에서 멀어져 끝나버린 사건으로 더 이상 괴롭고 싶지 않았다. 아니 괴롭지 않았다. 덮은 사람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어느새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고, 그렇게 가면 속의 그녀와 그녀 속의 가면은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 되고 싶었던 모습을 완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영을 만났다.
처음엔 누구라도 아니 뭐라도 상관없다는 듯한 세영의 태도에 끌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분위기에 취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은주는 가면 속, 미완의 자신을 비밀스럽게 그에게 조금 꺼내보였다. 그리고 그의 바뀐 태도에서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되었다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