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제2화
마트의 상품 진열이 끝나면 시계는 대개 7시를 가리켰다. 직원들이 출근해 포스 기계를 켜고 개시하는 9시까지 세영이 해야 할 일은 시들해진 채소와 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골라내는 것이었다. 빈틈없이 잘 진열된 매대에서, 있으면 안 될 것을 솎아내는 것은 그의 의무이자 책임 그 자체였다. 9시가 되어 직원들이 모두 출근하고, 정상적으로 마트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면 그는 아침밥을 준비하러 집으로 향했다.
그런 세영의 손에는 늘 무르기 직전의 상품성 없는 채소와 유통기한이 거의 다 된 가공식품이 들려있었다. 그는 항상 가지고 온 것들을 잘 손질해 냉동고에 넣었다. 마늘은 빻아서 얼음틀에 소분하고, 파는 송송 썰어 밀폐용기에 담았다. 다른 채소들도 한번 사용할 양으로 소분해 얼렸다. 그렇게 한창때의 열정을 식히고, 과거의 영광을 일부 간직한 채 얼어붙은 것들은,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박제화 되어 텅 빈 미라가 되었다.
집에서는 웬일로 양연이 아침밥을 하고 있었다. 얼었던 소고기는 구수한 기름 향을 내며 미역국 속에서 끓고 있었고, 묵은쌀의 군내는 밥솥의 친절한 멘트와 함께 '쉭~' 소리를 내며 증기로 날아가고 있었다. 냉동고에서 힘을 잃었을 진미채는 매콤 새콤한 소스와 물엿에 버무려져 반짝반짝 빨간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묵은 김치는 씻은 후 채 썰려 양념되었다. 유일하게 냉장고에서 나왔을 계란 프라이의 선명한 노른자는 화룡점정이었다. 그녀의 능수능란한 손길은 마치 새 생명을 부여하는 주술의식 같았다.
"어~! 이제 왔어? 추운데 고생했네... 어서 와서 밥 먹어! 오래간만에 미역국 좀 끓여봤어..."
세영이 몸에서 찬기운을 내뿜으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쫑이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런 쫑이를 들어 안으며 그가 양연에게 물었다.
"우와~! 아침부터 밥 한다고 고생하셨네... 근데 오늘 누구 생일이야? 웬 미역국?"
아주 짧은 순간 양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영은 예민하게 태어났지만 미세한 변화에 집중하지 않았다. 인식만 할 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가 반응해야 하는 대상은 오직 버릴 것들 뿐이었다.
텅 빈 (Empty)
세영은 이상한 병사였다. 그 누구로부터의 편지도, 그 누군가의 면회신처도 없었다. 심지어 부모에게서 조차 그랬다. 휴가나 외출이 취소되어도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늘 혼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사고를 치거나 딱히 관심사병으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또래의 말년 병사들처럼 숨어서 술을 마시다가 군기교육대에 끌려가거나, 밤에 몰래 일명 '뽀글이'를 해 먹다가 당직사관에게 걸려서 오는 일도 없었다.
그런 세영의 성향을 파악한 선임부사관은 말년병장인 그를 영내 도서관에 상주하는 보직으로 차출했다. 도서관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했기 때문에 그는 내무반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서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주 업무는 청소였지만, 대출과 반납을 관리하고, 오래되고 파손된 책을 솎아 폐기대상으로 분류하고, 신간 서적에 청구기호를 발행해 정리했다. 가끔씩 그의 외국어실력을 눈여겨본 장교들의 영어 논문을 대필하기도 했다.
세영의 군생활동안 딱 한번 편지가 온 적이 있다. 사실 편지도 아니고 엽서였다. 발신인은 그의 누나 미영이었다. 내용은 '잘 지내지?' 이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가 집에서 받았던 대우는 딱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한 번씩 그의 생사를 확인하듯 말을 걸어올 뿐, 아버지도... 엄마도... 그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마도 그녀를 통해 소식을 듣고 있는 듯했다.
세영은 어릴 때부터 미영과 비교되며 자라왔다. 그녀는 항상 모든 시험에 백점, 전국 상위권, 대학도 국내 최고 의대로 진학했다. 엽서를 보냈을 때는 수련의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의 부모는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그의 생사여부조차 정신없이 바쁜 그녀를 통해 듣고자 했었나 보다. 이런 냉랭함 속에서 그는 마치 냉동고의 식자재처럼 겉은 멀쩡했지만 속은 텅 비어갔다. 손질은커녕 방치되어 버린 과거는 미라조차 되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