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만남

내 인생의 짧은 奇談들… (4)

by 철없는박영감

※ 주의 : 100% real 제가 겪은 실화입니다.

난 너를 믿었던 만큼...


1993년 '핑계'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른 김건모는 1995년 3집을 발표하며 다시 한번 최정상의 가수임을 증명했다. '핑계'처럼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앨범 판매량이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대단했다. 그런 3집 앨범의 타이틀 곡이 '잘못된 만남'이었다. 지금도 많은 창작물들의 제목이 되어 주고 있는 노래다.


노래 자체는 테크노풍의 긴 전주가 인상적이다. 한참을 신시사이저가 같은 멜로디를 반복하면서 정말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춤추며 노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거의 2분 정도의 전주가 끝나면 속사포 같은 랩이 뒤를 잇는데, 지금이야 느리게 느껴지지만 발매된 당시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게 노래야?'라는 반응이 먼저였다. 주저리주저리 내뱉는 랩이 귀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세상 신나는 곡이 된다.


1995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다. 아버지가 '전화국 (당시에는 공무원이었음)'을 다니셔서 경기도 포천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공부 좀 한다고 해서 고등학교는 의정부로 진학하게 되었다. 의정부고등학교 하면 요즘은 튀는 졸업사진으로 더 유명한 학교지만, 당시에는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한수이북(漢水以北)의 명문(名門) 학교'로 불리며 자주색 교복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던 학교였다.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그래서 경기북부 지역의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많이 모였고, 그중에 한 명이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다 알던 애들이 그대로 중학교로 진학하던 것과 달리 고등학교 진학 때는 같은 학교 출신이 20명 남짓이었고, 다들 그래도 한 반에 2~3명씩은 모였는데... 유독 나만... 항상 나만... 꼭 이럴 때 나만 아무도 없이 혼자 1학년 2반에 배정되었다. 그나마 담임선생님이 포천 출신이라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등교 첫날, 어색한 공기 속에 뻘쭘하게 혼자 앉아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막 아무에게나 친하게 달려드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극 내향인) 혼자 책상에 도시락을 꺼내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갑자기 달려들어 내 도시락을 자기 친구들 무리에 밀어 넣더니 같이 먹자고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친구가 되었다.


이 친구도 전곡에서 의정부로 진학해 온 케이스였고, 혼자서 도시락을 꺼내고 있던 모습이 많이 안쓰러웠다고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자리배치를 다시 하면서 짝꿍이 되었고 낯선 도시에서의 고등학교 1학년을 그 친구를 포함한 몇몇과 재밌게 보냈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입시 때문에 수학여행이며 각 종 대외 행사를 전부 1학년때 끝냈다.


난 아무런 부담 없이...


1995년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은 우리 고등학생 사이에서 '룰라' 다음으로 센세이셔널했다. 그래서 그 빠른 랩을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다. 마침 친구 녀석이 앨범을 샀다면서 그 어려운 가사를 연습장에 적어 주었다. 열심히 가사를 외워 주말에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탬버린 흔들며 신나게 불렀다. 외우고 나서는 연습장이 더 이상 필요 없어졌지만, 그래도 친구가 적어줬다는 상징성 때문에 연습장을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시골에서 (지금 포천을 시골이라고 하면 욕먹으려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모여서 통학 버스를 대절해 주었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등교준비를 하고, 6시에 버스를 타서 학교에 7시도 안 돼서 도착하면, 아침 보충수업을 시작하고...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마치면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11시에 도착해서 씻고 12시에 잠들어서 다시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학교에 다니는 자신도, 그 새벽에 도시락 3개씩 싸야 했던 부모님도 못할 짓이었다. 늦은 귀가 탓에 불량배들에게 돈을 뺏기는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늦은 밤 11시에 매일같이 아버지가 마중을 나오시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을 고생하다가 고3이 되어 자율학습시간이 한 시간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하교시간이 11시가 되면서 더 이상은 체력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신 부모님은 하숙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주중에는 하숙집 할머니의 따뜻한 밥을 먹으며 학교를 다녔고, 주말이 되면 토요일 오전수업을 하던 때라서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시외버스를 타고 포천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아들과 떨어져 살아본 적이 처음이라서 주말에 집에 오면 거의 임금님 수라상처럼 으리으리한 밥상을 차리셨는데, 몇 주가 지나고 다시 라면이 주식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요일에 하숙집에 돌아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용돈 10만 원을 턱 손에 쥐어주셨다. '잉? 어젯밤 꿈을 잘 꿨나? 웬 횡재?' 속으로 신이 나서 룰루랄라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가 문밖으로 배웅을 하면서 마치 아들 군대 보내는 것처럼 안 보일 때까지 걱정하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서있었다. '잉? 뭐지?'


그 뒤로 한동안 주말에 집에 가면 아버지의 용돈 하사가 줄을 이었고, 엄마의 배웅은 날로 애처로워졌다. '잉?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데...' 그러고 보니 주말에 집에서 뒹굴뒹굴 굴러 다녀도 공부 안 한다고 혼내는 일도 없어졌다. 뭐 나야 용돈도 생기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나쁠 것이 없었다.


그 어느 날...


한 참을 지나, 이제는 대학생이었나... 군대 다녀오고 복학생이었나... 할 때, 주말 아침에 연예인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무대에 나와서 무작위로 숫자를 부르면 그 숫자에 맞는 노래방 기계의 노래를 가사 틀리지 않게 부르는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가족은 주말에 이 프로그램과 방랑식객이 나와서 요리를 해주는 프로그램 애청자였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는데... '잘못된 만남'이 나왔다. '오랜만에 추억 돋네...'라면서 '어린 아이돌들이 이 노래 모를 텐데... 가사도 어려운데...'라고 생각하며 재밌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헉! 이게 노래야?"


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자막으로 나오는 가사를 보면서 어이없어했다.


이제서야 난 느낀 거야 모든 것이 잘못돼 있는 걸...


옛날부터 엄마의 안 좋은 버릇이 있는데... 바로 책가방이나 책상을 뒤지는 것이다. 뭐 본인 말로는 애가 엇나갈까 봐 걱정돼서 그랬다고 하는데... 몇 번 항의하다가 고쳐질 기미가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다. 그때도 내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고이 모셔두었던 연습장을 발견했었나 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마어마한 내용의 글을 읽은 것이다.


엄마는 속으로 공부시키겠다고 도시로 혼자 보내놨더니 큰일이 났다며... 우리 아들 공부 다했다며... 대학은 물 건너갔다며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따져 물을 수도 없고, 잘못하면 엇나갈까 봐 노심초사하며 몇 개월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말 아침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신나게 그걸 노래로 부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아버지의 용돈 세례에, 엄마의 진수성찬에 몇 달간 신났었다.


ㅋㅋㅋㅋㅋ 그러게 왜 남의 책상을 뒤지고 그러셨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