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야 방귀야 (1)
애써봤자 나부랭이
큰일 났다. 비상이다. 3주 후에 사장이 방문한단다. 중대재해법 시행 후, 혹여나 공장에 인명사고가 날까 봐 뻔질나게 드나든다. 사실 사장의 인성 자체가 싫은 것보다, 거들먹 대며 깔보는 눈빛보다, 환경미화라며 광내고 기름칠하고 잡초를 뽑는 것보다... 그 밑에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소작농 등쳐먹는 마름같이 구는 공장장, 서로 일 떠넘기는 타 팀장들이 더 싫었다. 사장이야 잠깐 왔다 가면 그만이었다.
왜 자신을 공장장으로 뽑았냐는 질문에 사장은 '사고 안 칠 것 같아서'라고 답했단다. 그렇다 딱 그 정도의 역할이 기대됐는데, 자존심을 건드렸나 보다. 사장이 방문하기 전까지 각 팀은 보고자료 작성에 몇 날 며칠 날밤을 깐다. '보고자료 작성 중간점검 회의(이 말도 안 되는 낱말 조합을 쓰는 게 벌써 싫다)'에서 공장장은 길길이 날뛴다. 저렇게 가만히 앉아서 소리만 지를 거면 나도 공장장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고, 윗선에 잘 보이고 싶었으면... (나 같으면) 직접 뛰어서 성과를 만들었겠다. 사장이 온다고 하면 각 팀별로 성과를 보고하라고 하고는 회의를 소집해 팀장들을 모아놓고 길길이 날뛴다.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 되어, 그야말로 쥐어짠다. 슬슬 그럴 듯 해 보이는 보고자료가 되어 갈수록 내용은 희망사항들로 채워진다. 아마 지금의 소설 쓰는 능력과 마감신공은 그때부터 개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날 며칠밤을 새 가며 2주간 작성한 파일버전 숫자가 곧 세 자릿수가 될 것 같다. 운영의 묘미라며 점을 찍는 미친 짓을 한다. '~ ver_9.9.X_(최종본).pptx'. '버전 9개밖에 작성 안 했네...' 자기 최면을 건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괄호 안에 '최종본'이 진짜 최종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방문전날 점심시간까지 자료를 보내라는 비서실의 재촉 전화가 올 때까지도 수정에 수정은 거듭된다.
대충대충
아직 팀장이 되기 전 얘기다. 이때 공장장은 장교출신으로 사장님 오실 때면 영전(迎餞)을 해야 한다며 직원들을 공장 입구에 두줄로 사열시켰던 인물이다. 이미 피골이 상접한 몽롱한 상태로 팀장이 계속 자료 수정을 지시했다. 그러면 이때부터 오늘의 주제가 시작된다. 어차피 회의에 들어가서 깨지는 건 팀장이니, 팀장보다 나이 많고 입사 선배인 만년 차장과 뺀질뺀질한 후배는 대충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몽이 시작됐다.
사실 공장장을 빼고는 왜 이런 수정을 계속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자기가 보고할 자료라서...라고는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냥 마음에 안 든 거다. 검토할 새도 없이 팀원들이 수정한 자료를 받아서 회의에 들어간 팀장은 개박살이 났다. 그리고 인내심에 한계가 온 사람들 사이에 '내리 갈굼'이 시작됐다. 다시 손 걷어붙이고 열심히 해보자라고 으쌰으쌰 하는 시간이 이미 저녁 7시였다. 역시 새벽에나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팀장이 자리를 비우면, 만년 차장님과 뺀질이 후배는 지들끼리 히죽히죽거리며 웹서핑을 하고 놀았다. 사실 수정 지시가 내려온 장표는 80%가 넘게 그들이 작성한 거였다. 나머지는 lay-out이나 사진 수정 정도가 끝인데... 그들이 맡은 장표는 통계수치부터가 엉망이었다. 거의 처음부터 다시 하는 수준이었다. 아마도 이렇게 버티면 자신들의 장표는 그냥 누락될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한마다 했다.
"선배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해요? 그냥 대충대충 해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누구 때문에 이렇게 남아있는데... 말이야 방귀야!
검색을 해보니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가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정확한 출처는 없는 것 같다. 전부 '~카더라'같은 자료뿐이다. 아무래도 전래동화처럼 구전된 명언인 것 같다. 가장 유력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물론 등장인물은 이야기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위인을 등장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 경전 주석지인 미드라시, 또는 페르시아 지방의 우화에서 나온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러 "날 위한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전쟁에서 이겨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게 하며,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반지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으나, 빈 공간에 새겨 넣을 글귀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현명하기로 소문난 왕자 솔로몬에게 간곡히 도움을 청한다. 그때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글귀가 바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 글귀를 적어 넣어 왕에게 바치자, 다윗 왕은 흡족해하고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정반대의 두 가지 상황을 직관적으로 잘 조합한 명언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경구로써 애용되고 있으나, 정작 본래의 의미인 "기쁜 상황도 지나가니 함부로 교만하지 말고, 슬픈 상황도 지나가니 낙심하지 말고 항상 의연한 태도를 가져라" 보다는 현재의 슬픔이나 고통 또는 안 좋은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날 때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고 잊힐 것이라는 의미만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기쁘고 행복한 상황에서는 이 상태가 계속되길 바라는 게 대부분의 인간의 심리이기 때문. [출처 : 나무위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요즘은 본래의 의미보다 '대충대충 버티다가 그냥 넘어가자' 혹은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같은 '버티기' 또는 '손 놓고 가만히 있기'의 의미가 더 부각되어 사용되는 것 같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혼자가 될 것이다.